1) 프롤로그
달성군 구지면에 오설리가 있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도동서원에서 구지면 방면으로 약 4㎞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북동에서 남서로 길쭉하게 약 1.5㎞ 길이로 형성된 이 마을은 대니산 자락인 석문산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 마을입구는 남서쪽 끝에 있는데 이마저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낙동강에 막혀 있다. 지금이야 도로와 교통 사정이 좋아 큰 문제는 없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오설리는 오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군위방씨와 현풍곽씨 오랜 세거지이자 마을 모습이 까마귀 혀를 닮았다는 오설리에 대한 이야기다.
2) 까마귀 형국 명당
풍수지리는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하지 않는 전통시대에 사람들에게 지리와 인문에 대한 유용한 지식을 제공해준 분야였다. 풍수에서 터를 살피기 위한 방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이기론과 형국론이다. 이기론은 패철이라고 하는 나침반을 무기로 터의 방위를 동서남북, 씨줄·날줄로 사정없이 쪼개가며 분석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형국론은 좀 다르다. 방위 보다는 터와 그 주변 지형지물의 형국·형태를 분석하는 방법이다. 익히 들어본 바 있는 금계포란형, 옥녀탄금형, 와룡형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사람의 운명을 분석하는 명리학이나 관상학에 대입해보면, 이기론은 사주팔자를 놓고 인수분해 하듯 분석하는 사주명리학이요, 형국론은 ‘척보면 압니다’ 식의 관상학 정도쯤 된다고 할 수 있다.
형국론에서는 주로 사람·동물·꽃·나무 등이 등장한다. 특정 터가 어떤 사물을 닮았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다음으로 그 터가 해당 사물의 어느 부위쯤에 위치에 있는지를 가늠해 터의 길흉을 살피는 식이다. 하늘을 나는 새를 닮은 조류 형국에는 주로 기러기·금계[금닭]·봉황·학 등이 등장하는데 종종 까마귀도 등장한다. 까마귀가 등장하는 형국론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금오탁시형(金烏啄屍形)이다. 까마귀가 시체를 뜯어먹는 형국으로 주변에 공동묘지·도살장·오물처리장 같은 것이 있으면 자손들이 부귀를 이룬다는 명당이다.
3) 까마귀 혀, 큰등[오산등]
오설리(烏舌里)는 까마귀 혀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위성사진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크게 보면 고령군 개진면이 있는 북서쪽 방향으로 툭 튀어나온 현풍과 구지를 품은 대니산 자락이 까마귀 혀를 꼭 닮았다. 좁게 보면 오설리 골짜기 자체가 까마귀 부리 부분을 닮았다. 마을 북쪽 석문산이 까마귀 윗부리요, 남쪽 안산은 아랫부리요, 오설리 본동인 오리에 있는 큰등[오산등]이 혀요, 오설지가 있는 골짜기가 목구멍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설도 있다. 석문산과 안산이 까마귀의 좌우 날개요, 큰등으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까마귀 머리요, 큰등이 까마귀 혀라는 설이다. 어쨌든 까마귀 머리 앞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갈대 무성한 습지가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목마른 까마귀가 물을 마시는 형국이요, 갈대를 물기위해 내려앉는 형국이요, 습지에서 물고기를 잡아먹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까마귀 형국 오설리에서 최고 명당에 해당한다는 까마귀 혀 자리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
실제로 오설리에는 예로부터 큰등이 오설리 최고 명당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현재 큰등에는 현풍곽씨 청백리공파 파조인 청백리공 곽안방 선생 어머니인 수성나씨 부인 묘를 비롯한 현풍곽문의 선영이 조성되어 있다. 지역 야사에는 이 ‘까마귀 혀’ 명당을 두고 현풍곽씨와 군위방씨 두 문중 간에 치열한 다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풍곽문에서는 오설리 큰등 선영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큰등 선영이 까마귀 혀 자리에 위치한 장군대좌혈 명당인 까닭에 청백리공을 비롯한 존재 곽준과 망우당 곽재우 같은 걸출한 인물이 났다는 것.
4) 내동[본동·오리]
오설리는 크게 안마을 내동[오리]과 바깥 마을 외동에 밤마[밧마]·대추정[대치정]이 있다. 본동·내동 등으로도 불리는 오리(烏里)는 본래 연안차씨가 처음 터를 잡은 것으로 전한다. 이후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군위방씨와 현풍곽씨가 터를 잡아, 현풍곽씨[일부 순천박씨 포함]는 윗마을에 해당하는 윗덤에, 군위방씨[일부 밀양박씨 포함]는 아랫마을 아랫덤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오리에는 두 개의 큰 골짜기가 있는데 오리 마을이 자리한 큰골과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오설지가 있는 가마골이다.
오리 오설리 마을회관 인근에는 작은 느티나무 정자 숲이 있다. 수령 200년 정도 되는 느티나무 두 그루를 중심으로 나무 아래에 정자와 쉼터를 조성해 두었다. 예전에 오설리에는 세 곳의 당산나무가 있었다. 마을 뒷산, 안산 그리고 이곳 정자 숲 느티나무였다. 오설리 주민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당산에서 마을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마을동제를 행해왔지만, 우리나라 대부분 마을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으로부터 수십 전 동제의 맥이 끊겼다. 그런데 최근 10여 년 전 쯤 몇 몇 뜻있는 마을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오설리 마을 동제가 다시 부활됐다. 음력 정월대보름날 오전 10시에 행하는 오설리 동제는 예전처럼 예법과 금기사항을 다 준수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례만큼은 옛 법식을 따르고 있다.
옛날 오리에는 연꽃이 아름다웠던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한강 정구·대암 박성·존재 곽준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이곳을 찾아 풍류를 즐기고, 후학을 위해 강학을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도 오리 들에는 작지 않은 규모의 연밭이 있다. 오설리 마을기업에서 이곳 연밭에 연농사를 지어 연잎차·연꽃차 재료를 생산하고 있다. 오설리 출신 향토사학자인 곽정섭 선생은 옛날 연못의 위치를 지금의 오설지 못둑 아래 정자 인근으로 보고 있다. 이유는 예전 그 자리에 농사용으로 사용했던 ‘포강’이라는 물웅덩이가 있었다는 것. 여하튼 연못의 규모가 작았다면 포강이 있었던 곳일 수도 있고, 컸다면 지금의 오리마을 앞 연밭 일대까지 다 포함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오설리 큰 마을 오리에는 과거 서당이 세 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현풍지역을 대표하는 곽씨와 방씨 두 성씨의 400년 세거지이자, 동방오현 중 수현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모신 도동서원이 인근에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게다가 좀 더 넓게 보면 반경 10리 안에 이양서원·화산서원·암곡서원·송담서원·이로정·관수정 등 서원과 옛 선비들의 강학소가 많이 남아 있으니 더욱 그렇다. 한때 100여 호가 넘었던 큰 마을 오설리, 현재는 55호 정도가 남아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