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필자의 군 경험담을 얘기할까 한다. 군에서 중령부터는 언필칭 고급장교로 일컬어진다. 나는 중령으로 진급한 이후부터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다. 즉 고급장교인 중령까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진급에 연연하지 말고 현 계급이 마지막 계급이라는 생각으로 군 생활에 미련이 남지 않도록 하자고 스스로 다짐하곤 했다.
특히 대대장 시절, 같은 맥락에서 마지막 지휘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임하였다. 사실 사람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달리 보인다. 쓸데없는 욕심이나 사심보다는 그 일을 제대로 한 번 후회 없도록 해보자는 동기가 부여된다. 나는 대대장에 부임하면서 대대장 임무가 종료되었을 때의 최종 상태를 그려 보았다.
내가 대대장을 마칠 즈음에
우리 대대는 최고의 전투력과 사기로 충만되어 있어야 한다. 나와 대대 간부들은 골육지정으로 뭉쳐 평생 친구가 된다.
나의 이러한 포부와는 달리, 1997년 가을 내가 대대장으로 처음 부임했을 때 우리 대대의 여건은 매우 열악하였다. 사단 사령부로부터 두 시간 반이나 떨어져 있는 지리적인 격리 못지않게 상급 부대의 관심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또한 그만큼 간부들의 사기는 떨어져 있었고, 부대에 대한 애대심이 부족했다.
나는 대대의 여건이 아무리 어려워도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대대의 상징 명칭을 악착같이 돌격하여 적과 싸워 이긴다는 뜻으로 ‘악돌이 대대’로 명명했다. 매사에 나부터 솔선수범했다. 부하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애로사항을 연대와 사단에 건의하여 하나하나 조치해 주었다. 간부들의 작은 성과에도 큰 칭찬으로 사기를 고양했다. 격려를 위해 회식을 할 때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가급적 부부동반으로 참석시켰다. 그 자리에서 각자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남편이 부대에서 이러이러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고, 남편이 그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부대에서 잘 하고 있는 것은 모두 집에서 내조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와 대대 간부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까지 우리는 한 식구가 되어 갔다. 화합, 단결된 우리 대대는 연대는 물론 사단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대대장인 나도 그런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이다.
이와 같은 성과는 느낌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우리 대대는 1998년 연말에 사단 최우수 대대에 수여하는 ‘선봉대대’ 표창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실로 그 열악한 대대가 1년 여 만에 사단 최고의 대대가 된 것이다. 그 때의 감동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벅차다.
나와 당시의 대대 간부들은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 때 맺은 인연으로 매년 한 두 번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정을 나누고 있다. 당시 중위 계급으로 통신장교를 했던 한 친구는 전역 후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몇 년 뒤 자신의 결혼식 때 나에게 주례를 서 달라고 찾아 왔다. 나는 앞으로 법조계에서 생활하려면 명망 있는 그 분야의 선배님들에게 주례를 부탁하지 왜 군인인 나에게 주례를 부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대 통신장교 시절,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면 군 생활 하면서 존경하게 된 대대장님께 반드시 주례를 부탁하겠노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 당시 부하에 대한 충성, 즉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구용회 건양사이버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