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길을 묻고 답하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 푸른신문
  • 등록 2021-05-27 10:24:43
기사수정

초등학교 친구 중 2010년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박철 시인이 있다. 그는 월간 『좋은생각』, 2011년 1월호에 ‘겨울이야기’를 썼는데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펑펑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나는 옛 김포라 불리는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별다른 명승지도, 인물도 없는 들판에서 양천 현감을 지낸 겸재가 양천 팔경의 하나로 명명한 서해 낙조를 바라보며 어렴풋이 내 인생도 저렇게 붉고 아름답게 타올랐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늘 끓는 가슴은 있으나 아름답게 타오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사회는 혼란했고 입영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나는 불길한 예감에 미래를 맡겨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뒤척이며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그렇게 막막한 30년 전 , 속절없이 아름다운 눈이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가족보다 영원히 함께할 것 같은 친구들을 소중히 여긴 날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던가, 새해 전날이던가 기억이 분명치 않은 날 초등학교 동창 열댓 명이 우리 집에 모였습니다. 꼭 지금의 큰딸 나이이던 나는 친구들을 불러 밤새 작은 파티를 펼쳤습니다. 어른도, 그렇다고 아이도 아닌 사회 초년생들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의식하며 사랑의 한 쌍이 되고 싶은 시절이었습니다. 기타 치고, 샴페인을 터트리고,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면서 겨울밤을 보냈습니다.
그중에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는 구용회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정신차려 보니 용회와 문밖으로 나와 들판을 향해 오줌을 갈기고 있었습니다.
눈발은 그치고 입에서 하얀 김이 펑펑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린 서서 오줌발을 세우며 중얼거렸습니다. “너는 장군이 되어라, 나는 시인이 될 테니.”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신세라 생도에게 부러움도 적지 않았지만 나의 길을 가겠노라 다짐했습니다.
결국 나는 시인이 되고 용회는 지난 30년간 군인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지난해 용회는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나는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시인으로서 명예롭기 짝이 없는 상을 받으며 30년 전 겨울밤을 생각했습니다. 오늘밤 아이에게 이런 노래를 불러 주고 싶습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시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30년…”
박 철 시인이 백석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나는 그를 축하하는 기념패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그동안 기념패를 많이 받았지만 내가 준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이사갈 때도 항상 가장 먼저 챙긴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아마 이런 우정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구용회 건양사이버대학교 교수

0
푸른방송_사이드배너
영남연합포커스_사이드배너
구병원
W병원
인기글더보기
최신글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
-
하루 동안 이 창을 다시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