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지금으로부터 122년 전인 1899년 석류꽃 만발한 초여름. 대구선비 80여명이 상화대에 모였다. 상화대는 지금의 화원유원지 성산 서북쪽 낙동강변에 접해있는 바위벼랑이다. 최근 강변을 따라 사문진에서 달성습지까지 낙동강물 위로 데크 길을 조성한 바로 그 바위벼랑이다. 그 옛날 ‘상화대’에서 이제는 ‘화원동산’·‘사문진’으로 상전벽해 업그레이드된 대구 관광 핫플레이스. 이번에는 122년 전 이맘때 상화대에서 열린 ‘낙강상화대선유(洛江賞花臺船遊)’에 대한 이야기다.
2) 상화대·화원동산·사문진
상화대·화원동산·사문진에 대해서는 이미 본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가 있다. 예전 글을 접하지 못한 독자를 위해 간략하게 한 번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상화대는 꽃을 감상하는 대란 뜻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상화대에 대해 “작은 산이 큰 강을 베고 있는데 그 위가 평평하고 넓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왕이 꽃을 구경하던 곳이므로 화원현이라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 아래에 예전에 금강정(錦江亭)과 오류정(五柳亭)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화원동산은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일제에 의해 유원지로 처음 조성됐다. 이후 1979년 ㈜금복주가 이 일대 성산고분군·사문진·상화대 등을 한데 묶어 화원동산으로 개발·운영, 1993년 대구시에 기부체납 했다. 사문진은 과거 낙동강 중류 대표 나루터였다. 조선전기에는 무역 창고인 화원창과 대일무역 중심지인 왜물고가 설치되는 등 경상감영과 대구부로 이어지는 물류라인의 중심지였다. 근대에 와서는 1900년 3월 미국인 선교사 사이드 보텀[사보담]에 의해 ‘귀신통’이라 불렸던 피아노가 한국 최초로 사문진을 통해 대구로 들어왔으며, 1932년에는 이규환 감독의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가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현재는 사문진 주막촌, 유람선 운영, 데크길 조성, 다양한 문화행사 개최 등 대구를 대표하는 위락형 문화관광자원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고 있다.
3) 옛 그림에 나타난 상화대
한국국학진흥원 문중 기탁 유물 중에 조선말기 대구 선비 미강(渼江) 박승동(朴昇東)이 그린 상화대 서화 두 점이 있다. 이 서화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22년 전 작품이다. 그림 속 상화대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100여 년 전 옛 상화대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작품이다. 그림 가운데 두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낙동강, 우측에는 바위 절벽으로 묘사된 상화대가 있다. 두 그림은 서로 반대되는 위치에서 바라본 상화대의 모습인데, 상화대와 두 채의 집은 사실적 묘사가 아닌 작가 관점에서 주관적으로 묘사했다. 그림 상단에는 상화대에 대한 내력이 제법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림 속 낙동강에는 작은 크기로 묘사된 몇 척의 배 사이로 상대적으로 크게 묘사된 배가 한 척 있다. 낙강선유를 즐기는 배다. 이 배에는 십여 명의 선비가 타고 있는데 한 선비가 손을 번쩍 들어 상화대를 가리키는 것이 마치 상화대에 대해 문화관광해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뱃머리에는 술 또는 차를 담은 항아리도 보인다. 강변 쪽에는 돛을 내린 배가 몇 척 정박하고 있는데 아마도 사문진인 것 같다. 낙동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도 보이는데 하나는 천내천, 다른 하나는 진천천일 것이다. 또 몇 채의 집이 모여 있는 마을도 보인다. 지금의 구라리와 성산리인 것 같다.
4) 1899년 낙강상화대선유
1899년 초여름 개최된 낙강상화대선유는 대구 달성 인근 선비 80여 명이 참여한 뱃놀이다. 낮에는 상화대에서 시를 짓는 시회를 열었고, 뱃놀이는 야간에 진행됐다. 기록에 의하면 낮에 열린 시회에는 모두 92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날 참석자는 임재 서찬규를 중심으로 서우곤·서영곤·서갑수·우성규·우세동·이종기·이억상·최시술 등 달성서씨 문중원과 서찬규의 사우·제자들이 중심이었다. 주요 참석자들의 면면을 보면 조선말 대구를 대표하는 선비들이 총 망라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헌 이억상은 무태 출신 인천이씨로 학문과 덕행이 있어 관찰사와 어사에 의해 여러 차례 천거를 받았던 인물이다. 만구 이종기는 상화대 건너 고령 다산 출신 전의이씨로 퇴계학맥을 이은 학자였으며, 수차례 천거에도 불구하고 평생 처사의 삶을 산 인물이다. 경산 최시술은 대구 출신 경주최씨로 청도 풍각에 은둔한 성리학자였다. 서우곤·서영곤은 대구 동구 도동 측백수림 8부 능선에 있는 정자 구로정에서 결성된 ‘향산의 아홉 늙은이’ 향산구로회의 일원이다.
이날 선유가 열기기까지는 3년 정도 시간이 걸렸다. 낙강선유 시회에서 ‘三’자를 운으로 우성규가 지은 시에 “꽃다운 물가 노닐자는 약속 삼년이나 지나 오늘에야 배 오르니 흥이 더욱 솟아나네”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낙강상화대선유창수록」에 실려 있는 박승동의 시 서문에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어느 날 서찬규가 낙재 서사원의 ‘금호선사선유도’를 보여주면서 선유 전통을 이어가자는 제안을 했고, 3년 뒤 1899년 서찬규가 박승동에게 여러 어른들을 상화대로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낙강상화대선유가 열리게 됐다는 것.
낙강상화대선유에서 참석자들은 주자의 무이구곡시에 나오는 운을 가지고 각자 시를 지었는데, 서찬규는 황(荒)자를 받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 배로 달밤을 바라보니 안개 낀 강물이 넘실넘실 넓구나 / 흐르는 세월 이와 같아 만 구비 꺾이어도 동쪽 바다에 이르도다 / 호수와 산은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이 경관 누가 주재 하였는가 / 이락과 사수 가까이 있어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다네 / 선현들이 놀고 감상하던 곳 천년동안 그 이름 향기롭구나 / 부끄럽도다! 나에겐 부지런함이 없어 심전(心田)은 나날이 거칠어지네 / 다행이 좋은 벗이 있어 흰머리 되도록 함께 도왔네 / 지란 향기 물가에 반짝이기에 캐고 캐지만 광주리에 차지 않네 / 쓸쓸이 바라보며 무슨 생각하는가? 미인은 하늘 서쪽에 계시는 것을 / 초사를 몇 곡절 마치니 구슬퍼 애간장만 저미네 / 강촌 닭이 울려하므로 노를 돌려 다시 술잔 잡는다.
5) 에필로그
자료조사를 하다 보니 박승동의 상화대 그림 중 화면 중앙에 있는 두 채의 집을 낙동정사로 기술한 자료가 있었다. 하지만 낙동정사는 1901년 건립되었고, 상화대 서화는 이 보다 2년 앞선 1899년의 작품이다. 따라서 박승동이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낙동정사가 없었다. 다만 그림 속 집 위치가 지금의 낙동정사 위치와 동일하다고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간다면 박승동이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 과거 이곳에 있었다는 금강정과 오류정을 그린 것일 수도 있다.
[참고문헌 : 달성의 구곡과 선유문화·경도재선생문집]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