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앞서 우리는 3회에 걸쳐 우리 고장 수남·운림·와룡산구곡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옛 선비들은 구곡문화 외에도 인문학적 관점에서 자연을 향유한 문화가 더 있었다. ‘동천·누정·선유·유산’ 문화가 그것이다. 동천(洞天)은 세상과 격리된 은거지를, 누정은 아름다운 자연과 누정의 풍취를, 선유(船遊)와 유산(遊山)은 배를 타거나 산을 오르내리며 강과 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문화다. 이번에는 420년 전 우리 고장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선사와 죽곡리 부강정 사이 금호강에서 행해진 대구 ‘최고’ 선유, ‘금호선사선유’에 대해 알아보자.
2) 선비들 뱃놀이 선유
선유는 글자 그대로 뱃놀이를 말한다. 옛 선비들은 학문을 하는 틈틈이 산에서는 ‘유산’을, 강에서는 ‘선유’를 즐겼다. 선비들이 즐긴 선유는 일반적인 뱃놀이와는 성격이 달랐다. 선비들은 주로 스승·제자·동문들과 선유를 즐겼다. 선유를 통해 서로 간 결속력을 다지고, 감흥을 시로 읊고 음주를 즐겼지만, 세속적인 뱃놀이처럼 배에 기생을 태우거나 술을 흥청망청 마시지는 않았다. 여하튼 선비들의 선유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선유의 전 과정을 기록[선유록]으로 남겼다는 점이다.
선유문화의 원조는 중국 소동파의 ‘적벽선유’다. 우리나라에서는 이황의 ‘풍월담선유’·‘탁영담선유’, 정구의 ‘용화선유’·‘봉산욕행’ 등이 유명하다. 대구에도 이런 선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선유가 있다. 바로 우리 고장에서 행해진 ‘금호선사선유’와 ‘낙강상화대선유’다. 참고로 봉산욕행도 우리 고장과 일부 관련이 있다. 다사읍 금호강변 지암에서 출발해 부강정을 거쳐 구지면 도동서원에서 1박을 했기 때문이다. 조선 초 대구출신 중앙관료이자 대문장가인 서거정의 「대구십경」 중 ‘금호범주(琴湖泛舟)’도 금호강에서의 선유를 시로 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3) 금호선사선유(琴湖仙槎船遊)
금호선사선유는 ‘금호강변 선사에서 행한 선유’란 뜻이다. 포항 가사령에서 발원해 대구 북쪽을 동에서 서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하는 금호강은 전체 길이가 약 118㎞이며, 대구 통과구간은 약 40㎞다. 금호강이란 명칭은 ‘바람이 불면 강변 갈대밭에서 거문고[琴] 소리가 나고 호수[湖]처럼 물이 맑고 잔잔하다’는 것에서 유래됐다. 금호강 유역 중에서도 달성군 다사읍을 경유하는 하류 약 2.5km 구간을 특별히 ‘금호’라 부른다. 금호강물이 이 유역에 이르러 낙동강과 합류하는 탓에 유속이 느려지고 수면이 넓어지는 것이 마치 호수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금호선사선유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20년 전인 1601년 3월 23일 행해진 선유다. 조선중기 대구를 대표하는 선비이자 임란의병장이었던 낙재 서사원. 그는 임진왜란이 끝나자 고향인 이천리 선사 금호강가에 완락재를 건립했다. 이 완락재 낙성을 축하하기 위해 대구 인근 23인의 선비들이 완락재에 모였고, 그들이 개최한 선유가 바로 금호선사선유였다. 이날 선유에는 좌장인 서사원을 비롯해 감호 여대로·여헌 장현광 등 당시 대구를 중심으로 한 한강학파·여헌학파·낙재학파 선비들이 모였다. 1박 2일에 걸쳐 진행된 선유에서는 주자의 시 「무이정사잡영」 중 ‘어정시’를 차운해 시를 짓는 시회를 가졌다.
지난 1992년 금호선사선유를 한 폭 한지에다 시·서·화로 표현한 작품 하나가 세상에 나타났다. 선유가 있은 지 232년 후인 1833년 난파 조형규라는 화가가 완성한 ‘금호선사선유도’다. 선유도 제일 상단에 제목 ‘금호선사선유도’가 있고 바로 아래에 참석자 23인 명단이 있으며, 이름 아래에는 이름의 주인이 지은 시가 있다. 그 아래에 금호선사선유를 묘사한 그림이 있으며, 맨 아래에 여대로가 지은 서문이 있다.
4) 선사암·선사재·완락재와 부강정
이천리에서 하빈으로 넘어가는 마천산 고개 초입에 이천삼거리가 있다. 예전에는 이 삼거리 금호강변에 선사나루가 있었다. 선사는 과거 이곳에 고운 최치원이 한 때 머물렀던 신라시대 고찰 선사암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불교 암자였던 선사암은 당시 많은 사찰이 그러했듯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처음에는 대구 유학 1세대 임하 정사철의 강학소인 선사재가 되었다가, 임란 직후에는 낙재 서사원의 강학소인 완락재로 변신한 것. 『낙재집』에는 옛 완락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강당은 완락, 동재는 경재, 서재는 의재라 하고, 최고운의 옛 고적을 그리면서 당 아래엔 세연지란 옛 못을 파고, 무릉교를 쌓고 난가대·연어대도 만들었다.
선사(仙槎·仙査)는 고대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큰 뗏목을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300년 전인 요임금 시절, 12년을 주기로 하늘을 한번 운행하는 거대한 뗏목이 있었는데 그 뗏목이 선사였다. 완락(玩樂)은 주자의 『명당실기』라는 글에서 취한 것으로 “경을 지니고 의를 밝히는 공부를 즐기며 싫증내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선사암·선사재·완락재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현재 두 가지 설이 있다. 이천삼거리에 접한 동쪽 기슭에 있었다는 설과 지금의 이강서원 자리에 있었다는 설이다.
한편 「금호선사선유서문」에는 임란으로 훼손된 당시 부강정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 있다.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부강정 일원은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 옛날 신라왕이 와서 노닐었다는 곳으로 지금의 강정마을 일원이다.
날이 저물자 배를 부강정에 댔다. 이 정자는 진사 윤대승이 지은 것으로 대마루 기와는 병화를 입어 불 타 버렸고, 윤진사가 이 세상의 인연을 다한 지 10년도 채 못 되었건마는 부서진 집이 다만 저녁 비에 젖어있고, 송죽의 그림자가 텅 빈 뜰에 서로 얽혀 있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또한 산양(山陽)의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구나. 강촌에 어둠이 다가오자 정사에서 투숙하고자 하였으나, 방이 몇 칸 안 되어 일행들이 다 잘 수는 없었다. 나와 사빈[이규문]은 돌아와서 학가[이종문]의 집에서 잤다.
5) 에필로그
지금으로부터 420년 전이자 7년간의 임진란 직후인 1601년 어느 봄 날, 23인의 대구 선비가 금호 선사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이날 선유는 임진란에서 살아남은 대구 선비들이 스승 낙재 서사원의 서재인 완락재 낙성을 축하함과 동시에, 이를 계기로 대구 문풍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을 다짐하는 회합의 장이었다. 그들은 학문을 하는 선비답게 선유 제목을 창대하게 뽑았다. ‘거문고 소리 들리는 호수 금호에서 신선이 타는 전설 속 뗏목을 타다’. 전쟁 직후 끔찍하게 힘든 시기였지만 선비들은 스승·제자·동문과 함께 했던 그 순간만은 선사를 타고 하늘과 강을 오가는 신선놀음을 꿈꿨던 모양이다.
중류에서 가는대로 배를 맡기니, 저 하늘을 나는 신선 같아라 [금호선사선유시 마지막 구절, 반학헌 김극명(당시 최연소 21세)]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