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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64. 우리 고장 구곡(九曲) 문화(3) ‘와룡산구곡’
  • 푸른신문
  • 등록 2021-04-22 12: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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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와룡산에서 금호강을 바라보며
와룡산구곡(臥龍山九曲)은 근대 인물인 학암(鶴菴) 신성섭[申聖燮·1882~1959] 선생이 설정하고 경영했던 구곡이다. 와룡산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와 달성군 다사읍에 걸쳐 있는 산으로 북쪽으로 금호강에 맞닿아 있다. 와룡산 용머리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 금호강 너머 사수동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금호강을 따라 서재와 세천산업단지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와룡산구곡은 제1곡 사수에서 시작해 금호강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서 제9곡 청천에서 끝나는 약 7.5㎞ 구간이다. 와룡산구곡 아홉 굽이는 굳이 배를 타거나 일일이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된다. 조금 힘이 들지만 와룡산 용머리 정상에 오르면 구곡 전체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와룡산구곡은 앞서 살펴본 운림구곡과 일부 구간이 중첩된다. 운림구곡 7곡 선사, 8곡 봉암, 9곡 사양서당이 그렇다. 신성섭은 와룡산구곡을 통해 대구 유학 중시조인 한강 정구의 학문이 금호강을 따라 대구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음을 알리는 듯하다.

○ 제1곡 사수(泗水)
대구 북구 사수동이다. 운림구곡 제9곡 사양서당과 같은 공간이다. 대부분 구곡은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설정된다. 그런데 와룡산구곡은 반대다.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면서 설정되어 있다. 제1곡을 정구의 유적 사양정사가 있는 사수로 설정한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구의 학문이 금호강을 따라 대구 전 지역으로 전파됐음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제2곡 송도(松濤)
사수에서 해랑교 방향으로 두 번째 만나는 경부선 철도교량 북쪽 언덕이다. 송도라 이름 한 것은 언덕 위 푸른 소나무 숲과 그 아래 급하게 꺾어 흐르는 금호강 물결을 함께 이른 것이다. 정구가 금호강을 내려다보며 ‘연비어약’의 이치를 관조했다는 관어대 역시 이곳에 있었다.

중앙에 해랑교, 오른쪽 끝 아파트 단지가 사수다

○ 제3곡 해랑(海娘)
다사읍 방천리와 박곡리를 잇는 해랑교 일원이다. 지역민들은 이곳에 있었던 옛 다리를 ‘도깨비 다리’라고 불렀다. 옛날 한 여인이 외동딸 해랑을 데리고 이곳 박곡리에 들어와 주막을 열었다. 해랑이 자라 출가한 뒤 해랑 어멈은 강 건너 홀아비와 사랑을 나눴다. 밤마다 사람의 눈을 피해 금호강을 건너는 해랑 어멈과 홀아비를 위해 해랑 부부는 며칠 밤에 걸쳐 돌다리를 놓았다. 주민들은 갑자기 생겨난 이 다리를 도깨비들이 놓은 것이라고 해 도깨비 다리라 불렀다. 해랑교를 건너 박곡리로 가다 첫 번째 만나는 마을이 해랑마을[해랑포]이다.
○ 제4곡 용두(龍頭)
방천리 와룡산 용머리 일원으로 운림구곡 제8곡 봉암과 같은 지역이다. 용두 정상에 오르면 와룡산을 휘감는 금호강을 포함해 와룡산구곡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와룡이란 산 이름은 옛날 이곳 옥연(玉淵)이라는 연못에 살았다는 용 전설에서 유래됐다. 옥연의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동네 여인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고, 이 때문에 승천하지 못한 용이 땅에 내려 앉아 와룡산이 됐다는 전설이다.

서재(좌), 박곡(우)을지나 세천으로 흘러가는 금호강

○ 제5곡 학림(鶴林)
박곡리와 서재리 금호강변이다. 학림은 푸른 소나무 숲에 한 무리 학이 내려앉아 깃든 모습을 말한다. 아마도 금호강까지 산줄기가 이어지는 박곡리 앞산 또는 서재1리 동산 북쪽 끝자락이 아닐까싶다. 동래정씨 집성촌 박곡리에는 학우재, 성주도씨 집성촌 서재리에는 용호서원·치경당 등이 있다.
○ 제6곡 계월(溪月)
달천리와 세천리 금호강변이다. 세천산업단지 조성으로 옛 모습은 사라졌다. 다행히 세천리 금호강변에 가지암(可止巖)이라 불리는 바위벼랑이 일부 남아 있다. 청주양씨 집성촌 달천리에는 묵헌재, 능성구씨·김령김씨 집성촌인 세천리에는 금회영각 등이 있다.
○ 제7곡 백석탄(白石灘)
이천리와 세천리 사이 금호강변이다. 동에서 서로 흐르던 금호강물이 거의 90도 각도로 남쪽으로 방향을 트는 지점이다. 지형 특성상 물살의 공격을 받는 이천리 쪽에는 바위벼랑이, 그 아래엔 물돌이가 이는 큰 여울이 있었을 것이다. 백석탄이라 이름 한 것을 보니 당시 바위벼랑이 흰빛을 띄었나보다. 이천에는 추계추씨 문중 경로재·고동재·영사각과 달성서씨 문중 선영·이강서원·앙모재 등이 있다.
○ 제8곡 선사(仙 )
다사에서 하빈으로 넘어가는 이천삼거리 일원으로 ‘운림구곡’ 제7곡 선사와 중복되는 지점이다. 최치원 유적인 선사암과 임하 정사철의 선사재가 있었던 곳이다. 1601년(선조 34) 서사원을 비롯한 선비 23인의 뱃놀이인 ‘금호선사선유’의 배경이기도 하다.
○ 제9곡 청천(晴川)
세천리와 매곡리 사이 금호강변으로 세천교 인근쯤 된다. 와룡산 용두에서 바라보았을 때 금호강물이 궁산 뒤로 꼬리를 감추며 사라지는 부분이다. 와룡산 구곡시는 ‘와룡이 여의주를 얻었다면 구만리를 마음대로 올랐을 것을’로 끝이 난다. 신성섭이 스스로를 승천하지 못한 와룡에 빗댄 듯 아쉬움이 묻어난다.

2) 운림구곡 축소판
와룡산구곡은 운림구곡 축소판으로 운림구곡 중 와룡산에서 조망이 가능한 지역을 대상으로 설정됐다. 와룡산구곡은 사수동에서 매곡리까지 총길이 7.5km, 운림구곡은 사문진에서 사수동까지 16km다. 길이로만 보면 와룡산구곡이 운림구곡의 딱 절반이다. 금호강 남쪽 지역인 세천리, 서재리, 방천리는 옛 경관이 많이 사라졌지만, 북쪽인 박곡리, 달천리, 이천리는 아직도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간간히 구곡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3) 에필로그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즐기는 것은 매한가지다. 다만 개개인의 철학이나 취향에 따라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미를 이해하는 관점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 선비들은 유학자였다. 특히 조선의 선비들은 주자의 뒤를 이어 이(理)와 기(氣)에 대해 치열하게 파고든 성리학자였다. 그들은 이기론(理氣論)을 학문으로서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로까지 확장시켰다. 한마디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철학자이자 종교인(?)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구곡시에서 순차적으로 등장하는 아홉 굽이를 도에 이르는 학문의 단계로 표현한 것도 다 이 때문이다.
태산이 세상에 이름난 것은 공자라는 인물을 얻는 까닭이다. 수남구곡·운림구곡·와룡산구곡 역시 대구를 연고로 한 훌륭한 선비를 얻은 덕에 세상에 알려졌다. 그들이 구곡을 설정해 이름을 지어주고 또 시로 읊어주지 않았다면, 제 아무리 아름다운 경관을 지녔다 해도 세상에 오랫동안 널리 알려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처럼 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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