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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61. 일연 스님과 비슬산 그리고 삼국유사
  • 푸른신문
  • 등록 2021-04-01 14:2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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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달성의 역사는 비슬산과 낙동강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특히 달성의 불교문화를 논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이 비슬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등재된 달성 사찰 12개소 중 비슬산에 있는 것이 10개소다. ‘대견사·소재사·도성사·속성사·정백사·유가사·인흥사·용연사·용천사·연화사’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대부분이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과 직간접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일연 스님은 불문생활 71년 중 절반이 넘는 37년을 비슬산에 주석했다. 이번에는 일연스님과 비슬산 그리고 『삼국유사』에 대해 알아보자.

비슬산 대견사

2) 1차 비슬산 주석기
일연[一然·1206-1289] 스님은 경북 경산 출신으로 성은 김씨요, 이름은 견명이다. 법명은 처음에는 회연, 후에 일연으로 고쳤다. 국존호는 원경충조, 시호는 보각, 탑호는 정조다. 어머니가 꾼 태몽은 사흘 동안 어머니 방에 해가 들어와 어머니 배를 비추는 꿈이었다. 일연은 9세 때 광주 무등산 무량사에 입산했다. 무신집권기였던 당시에는 교육제도가 무너진 탓에 꼭 불문에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부를 위해 사찰에 들어가는 예도 많았다. 『파한집』의 저자 이인로, 『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 등이 좋은 예다.
일연은 14세 때 설악산 진전사로 옮겨 비로소 정식으로 구족계를 받았다. 진전사 시절 일연은 설악산 일대 선방을 두루 다니며 명성을 얻어 구산선문 내 사선의 우두머리로 추대됐다. 22세 때 승려를 대상으로 하는 과거시험인 선불장에서 장원급제에 해당하는 상상과에 합격했다. 이후 주지로 첫 발령을 받은 곳이 우리 고장 비슬산 ‘보당암’이었다. 보당암에서 10년을 보낸 일연은 이후 비슬산 묘문암에 주석하던 32세 때, 문수보살로부터 “무주 북쪽에 있으라”는 계시를 받고 무주암으로 옮겼다.[무주암 역시 비슬산에 있었다] 무주암에서 “중생의 세계는 줄지 않고 부처의 세계는 불어나지 않는다”는 화두로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같은 해에 삼중대사가 되고, 41세에 선사가 됐으며, 44세에 비슬산을 떠나 남해 정림사로 주석처를 옮겼다.
일연의 비슬산 1차 주석기는 22세-44세까지 23년간으로 보당암·묘문암·무주암에 주석했던 시기다. 이 시기 비슬산은 일연에게 있어 초임지, 선수행을 한 수도처, 깨달음을 얻은 오도처였다고 할 수 있다. 보당암·묘문암·무주암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현재 유력한 설은 최근 중창된 대견사 자리에 보당암이 있었다는 설이며, 묘문암과 무주암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치가 않다.

비슬산 자연휴양림 내 일연 스님 동상과 기념비

3) 2차 비슬산 주석기
1249년(고종 36), 일연 나이 44세. 일연은 상국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 정림사로 옮겨 재조대장경 간행을 주도했다. 재조대장경은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을 말한다. 이후 남해 길상사를 거쳐, 55세에 대선사에 올라 왕명으로 당시 수도였던 강화도 선월사로 주석처를 옮겼다. 59세 때 포항 오어사에 주석, 같은 해 인흥사 주지 만회의 권유로 비슬산 인흥사로 주석처를 옮겼다. 이로써 2차 비슬산 주석기가 시작된 것이다. 63세 때는 원종의 명으로 운해사에서 선종과 교종의 명망 있는 스님 100명이 모여 ‘대장경낙성법회’를 열 때, 주맹(主盟)으로 ‘백고좌법회’를 주관했다. 69세 때 인흥사 중창불사를 주관하고 본래 사찰명이었던 ‘인홍사(仁弘社·결사체라는 의미로 社라고 표기)’를 ‘인흥사(仁興社)’로 개명했다. 이때 고려 충렬왕이 황금으로 쓴 인흥사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인흥사는 사액사찰이 됐다. 당시 인흥사에 충렬왕이 하사한 황금어필이 존재했음은 도은 이숭인의 시에서 확인된다. “인흥사에 황금으로 쓴 열조의 사액이 있다”, “황금으로 쓴 천상의 필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숭인은 젊은 시절 인흥사에서 과거공부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1세 때 비슬산 동쪽 용천사를 중수해 불일사로 개명하고 ‘불일결사문’을 지어 불교개혁을 위한 결사운동을 벌였다. 당시 ‘불일결사문’에 감명을 받은 충렬왕은 직접 결사문을 써내려 불일사에 걸도록 했다. 현재 학계에서는 불일사·용천사의 전신을 지금의 청도 각북 ‘옥천사’로 보고 있다. 옥천사는 그 유명한 의상대사 화엄십찰 중 한 곳이다. 이후 일연은 청도 운문사와 고려 제일의 사찰 개경 광명사 등에 주석했다. 78세에 국존에 책봉되고 79세에 하산처인 군위 인각사로 내려왔다. 인각사를 하산처로 택한 것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함이었다. 세속 나이 84세, 불문 나이 71세로 일연은 인각사에서 입적했다.
살펴본 것처럼 일연 스님의 2차 비슬산 주석기는 59세~72세까지 인흥사·불일사에 주석했던 13년이다. 이 시기는 일연이 그간 수행정진을 통해 얻는 지식을 바탕으로 불교개혁과 불교대중화 그리고 저술활동에 힘을 쏟은 기간이라 할 수 있다.

4) 삼국유사와 비슬산
우리는 학창시절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접한 바가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국명에 의해 편찬된 관찬사료 즉 국가공인 정사, 일연의 『삼국유사』는 불교사와 신라사를 중심으로 하는 야사(?)의 느낌으로 배웠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일연 스님은 어디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러 설이 있다.

현재 『삼국유사』를 집필한 찬술처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일연이 국존으로 책봉되어 하산소로 삼았던 군위의 인각사라거나, 비슬산을 떠나 주석했던 청도의 운문사라는 주장이 있어왔다. 최근에는 일연이 37년간 활동한 비슬산이 『삼국유사』의 찬술처라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그중에서 1278년 인흥사에서 『역대연표』가 간행된 이후 1283년 국존으로 책봉되던 운문사 주석 시기에 『삼국유사』를 본격적으로 찬술했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략) 『삼국유사』는 일연이 비슬산에 머물면서 내용을 구상하고 기초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출판을 위한 마무리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 뒤 운문사나 인각사 등지에서 최종적인 교정과 감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달성지역과 비슬산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찬술처라 할 수 있겠다. 『달성의 불교문화, 김재원·정동락, 2018』

5) 에필로그
일연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보각국사비명’에는 『삼국유사』란 말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삼국유사』가 일연 스님의 저술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인터넷은커녕 전화조차 없던 시절,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도 제대로 된 역사서 한 권을 내려면 짧아도 족히 수년은 걸린다. 지금으로부터 약 730년 전 일연 스님이 살았던 고려시대라면 아무리 빨라도 10년은 넘게 걸리지 않았을까? 일연 스님이 자료를 수집하고 집필을 시작한 곳은 아무래도 우리 고장 ‘비슬산’인 것 같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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