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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58. 성서 토박이 고향사랑, 마을 유래비(1)
  • 푸른신문
  • 등록 2021-03-11 17:4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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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우리 고장에 ‘성서(城西)’라는 지역이 있다. 대구읍성 서쪽에 있어 성서라는 이름을 얻었다. 성서는 20~30년 전만해도 시골 모습이 완연했지만, 지금은 성서공단과 신도시 조성으로 옛 모습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다행히 성서의 옛 흔적,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맛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400~500년 이상 성서에 터를 잡고 살아온 성서 토박이들이 남긴 ‘마을 유래비[유적비·유허비]’ 덕분이다. 성서의 중심 갈산을 기준으로 반경 약 2㎞ 내에 그들이 남긴 마을 유래비 10여 기가 있다. 이번에는 2회에 걸쳐 우리 고장 성서에 있는 마을 유래비에 대해 알아보자. 비문 중에는 기존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는 내용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비문 내용을 우선하기로 한다.

2) 망정(望亭)부락 유적비
망정부락은 과거 갈산 남동쪽 기슭에 있었던 마을이다. 마을역사는 약 450년으로 선원마을에서 옮겨온 김해허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 이후 전주이씨·인천채씨를 비롯한 밀양손씨·성산배씨·달성서씨·문화류씨·금성나씨 등이 정착해 150여 가구의 큰 마을을 이뤘다. 하지만 1987년 마을이 성서공단에 편입되자 주민들은 인근 이곡동으로 집단이주를 했다. 망정은 마을 남쪽으로 ‘큰 정자나무가 바라보이는 마을’이란 뜻이다. 유적비는 망정 주민 300여 명이 뜻을 모아 1992년 조성한 것으로 성서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마을 유적비다. 비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달서구 성서로 243, 대로변 공장입구]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과 조상대대로 살아온 유래와 그리고 마을의 유적을 길이 남기기 위하여 망정사람들의 정성을 모아 이 돌에 새겨 길이 전하고자 한다.

와룡공원 내 신당동 당산나무와 유래비

3) 신당동(新塘洞) 유래비
신당동은 와룡산 남쪽 지금의 와룡공원 일대에 있었던 마을이다. 1990년을 전후해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면서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 신당동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백촌 김문기 선생 후손인 김녕김씨가 처음 터를 잡았고, 이후 경주이씨·수성나씨·군위방씨 등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신당은 본래 ‘오정(五亭)’이라 불렸다. 마을에 다섯 그루 정자나무가 있어 불린 이름이다. 그 후 1760년 김악소라는 인물이 사재를 내어 마을 앞에 길이 500m 보를 쌓은 후부터 ‘새 제방이 있는 마을’ 신당이라 불렸다. 신당은 위 네 성씨 외에도 김해김씨·능주구씨·인동장씨·밀성박씨·경주최씨·영산신씨·단양우씨·달성배씨·옥천전씨·의성김씨·야성송씨·창녕조씨·성주이씨·진주강씨·함안조씨·성주도씨 등이 살았던 큰 마을이었다. 유래비 바로 뒤편에 지역출신 인물 3인의 송덕비가 있고, 인근에 옛 오정자 나무 중 한 나무의 2세목인 팽나무도 한 그루 있다. 비문에 성서 대표 들판인 ‘살미들’에 얽힌 재미있는 표현이 남아 있어 흥미롭다. [1994.11.24. 건립, 달서구 선원남로5, 와룡공원 내]

…이곳은 삶의 명당인지라 인재가 많이 나고, 자인 규수가 이곳 낭자와 혼담이 있자 그의 부모가 그곳은 메마른 곳이라 시집가면 고생한다하니 “자인경산 오는 비가 신당 서촌 아니오리.”하고 노래 한 것을 보나, 또 “이 고장에서 자라난 처녀들은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못 먹고 간다.”는 속담을 보더라도 먹고 살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선원(仙源)마을 유래비
선원마을은 신당동 동쪽 마을로 지금의 성서도서관 일대에 있었던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년 전 김해허씨가 처음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김해허씨는 번성하여 성서 일대 망정·장동·갈산 등으로 퍼져나갔다. 선원이란 마을명은 조선중기 대학자 선원 김상용의 호에서 유래됐다고 한다.[김상용의 시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유래비에는 과거 선원에 있었던 옛 마을 이름과 위치가 일부 소개되어 있다. [1995.3.12. 건립, 이곡동 445 목련공원 남동쪽]

…최근 도시개발로 앞동산 건너 안산이 평지로 변하여 시장과 관공서가 들어서고, 뒷 솔밭은 보성·주공, 배양골은 청구·에덴, 불미골은 대백·한라 등 높은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샘골은 선원초등학교, 양지골은 성서고등학교, 선원못은 이곡초중등학교가 세워졌으며 (중략) 세월 따라 산천의 변화로 옛 흔적과 동리 이름이 없어져 가기에 우리 동민은 이를 애석히 여겨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모아 그 이름 선원마을을 이 돌에 새겨 오래오래 전하고자 한다.

갈미마을 내력을 새긴 갈미유허비

5) 갈미[갈산] 유허비
갈미는 갈산 서편에 있었던 마을이다. 약 470년 전 동래정씨가 처음 터를 잡고, 이어 김해허씨·성주이씨·함안조씨·달성배씨·달성서씨·영동김씨·경주이씨·밀양손씨·성주도씨·청주양씨·밀양박씨·반남박씨·대구하씨·평산신씨·창녕성씨·인동장씨·김해김씨·해주오씨·담양전씨·문화류씨·전주이씨·경주최씨·남양홍씨·여양진씨·천안전씨 등 약 150호가 살던 큰 마을이었다. 갈산이란 이름은 갈나무[떡갈나무]가 많은 산이란 뜻이다. 옛 문헌에는 가을산리(加乙山里)·갈산리(葛山里) 등으로 나타난다. 1986년 경 성서공단이 조성되면서 옛 모습을 잃었고, 1994년 주민들은 인근 신당동 앞으로 집단이주를 했다. 비문을 통해 지금은 사라져 버린 갈미 옛 지명 일부를 확인할 수 있으며, ‘내 고향 갈미(허기춘)’·‘이향탄(조영창)’ 두 편의 시와 함께 고향을 떠난 주민들의 망향심을 확인할 수 있다. [1996년 봄 건립, 달서구 갈산동 390-1 도로변]

…이 살미들은 못자리 없이 처음 삶은 논밭에 바로 볍씨를 점파하는 삶이식 농사법으로 산두를 많이 재배했으므로 ‘살미들’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살미들 주위에는 원덩·하살미·한들·새개·망상굼·오랫들 등 낮은 지대가 많아 “메기가 하품만 해도 물이 담는다”는 말까지 나왔다. (중략) 1986년 성서공단 조성으로 산과 들이 공장 터로 바뀌고, 조상들의 산소도 옮겨졌으며, 1994년에는 조상 대대로 살던 집도 비우고, 이웃 신당동 앞으로 집단 이주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이제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가야 할 것이나, 지금의 이만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도, 모두가 우리 조상들이 고향을 가꾸고 지켜온 은덕이라 할 것이니, 이에 우리 후세들에게 조상들의 삶의 자취와 유래를 전하고자 옛터 한 자락에 이 비를 세운다.

6) 사령봉(史令奉) 유래비
사령봉은 대구지하철 2호선 성서산업단지역과 계명대역 사이 지금의 사령봉 공원 인근에 있었다. 사령봉 마을청년회에서 세운 유래비에 사령봉 내력이 새겨져 있는데 흥미롭다. [1997.5.18. 건립, 이곡동 1216 사령봉공원 서쪽 끝]

임금님의 칙사가 민정시찰을 하던 중 상주에서 지금의 이곡동에 왔다가 해가 저물어 돌아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노숙을 하고 다음 날에 임금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자기가 노숙했던 곳을 사령봉이라 이름 지어 보고하였는데 그 이름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음에 계속]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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