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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55. 거미줄 형국 가창면 주리와 육룡소
  • 푸른신문
  • 등록 2021-02-19 10: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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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우리 고장 달성군은 땅이 참 넓다. 그래서 자연환경은 물론 먹고사는 환경도 매우 다양하다. 넓은 들에서는 농업, 산지에서는 임업·광업, 강변에서는 어업, 공단에서는 공업, 도회지에서는 서비스업 등 정말 없는 게 없다. 한마디로 전통과 현대가 한데 어울려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달성군에서 산 좋고 물 좋기로는 비슬산을 기준으로 서쪽 유가읍과 동쪽 가창면이 대표적이다. 가창면은 대구 명당수 신천의 발원지다. 대구 도심에서 신천을 따라 상류를 향해 걸으면 고개는 물론 작은 언덕 한 번 만나지 않고 가창면 끝자락까지 갈 수 있다. 이처럼 가창면은 비슬산에 가로 막힌 유가읍에 비해 대구로의 접근성이 유리하다. 그럼에도 가창면은 유가읍에 비해 현재 도시화가 덜 된 청정지역이다. 이번에는 가창면 남쪽에 자리한 주리와 주리에 있는 육룡소에 대한 이야기다.

2) 신라시대 지금의 대구를 관할했던 가창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신라시대 때 지금의 대구 전체를 관할했던 곳이 가창이라니. 최정산괴와 용지산괴 사이에 끼어 있는 가창. 대구와 청도를 잇는 길목에 있는 고을 가창이 대도시 대구를 관할했다니. 그런데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 요약해보면 이렇다.

수창군[가창군이라고도 한다]은 본래 위화군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수창군으로 개칭됐다. 군 아래에 네 개의 현을 두었는데 대구현·팔리현·하빈현·화원현이다.

지금의 가창은 신라시대 때 위화군·수창군[가창군], 고려시대 때 수성군으로 불렸다. 위 내용에 나오는 군·현을 현재 기준으로 보면, 수성군은 신천 상류 수성구 일부와 가창면, 대구현은 신천 중류 대구 중심지역, 팔리현은 대구 칠곡, 하빈현과 화원현은 각각 하빈면과 화원읍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 내용처럼 신라중대말기에 수창군이 대구·팔리·하빈·화원 네 현을 관할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진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다. 『대구시사』에 그 이유가 소개되어 있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신문왕은 689년 신라 수도를 경주에서 달구벌로 천도하려다 귀족의 반발로 실패했다. 천도 예상지가 위화군[수창군]이 아니라 달구벌[대구]이었다는 것은 당시 달구벌의 위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달구벌 천도 계획 실패 이후, 신라 입장에서는 달구벌의 위상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군치(郡治)를 달구벌이 아닌 위화군에 둔 것이다.

육룡소 전설이 깃들어 있는 주리천
주리 하촌마을 들판에 서 있는 느티나무 신목

3) 뒷산바위가 거미줄 형국, 주리
‘거뭇골’로 불리는 주리(蛛里). 주는 ‘거미 주’ 자다. 마을 이름에 왜 생뚱맞게 거미를 뜻하는 글자가 붙은 것일까? 가창면 남쪽에 위치한 주리는 동·서·남·북 네 방향 중에서 오직 동쪽만 터여 있고 나머지 세 방향은 최정산에 둘러싸여 있다. 동서 양방향으로 약 4㎞에 이르는 긴 골짜기 탓에 하늘에서 보면 주리는 좌우로 길쭉하게 늘인 말발굽 ‘⊂’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년 전인 1570년 경 김해김씨가 주리에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비친 마을 뒷산 바위가 마치 거미줄이 얽힌 것 같아 주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현재 주리는 동쪽인 골짜기 입구 1리와 서쪽인 골 안 2리로 나뉜다. 자연마을로는 주1리에 다리목·하촌·조산이 있으며, 주2리에 중주·내주가 있다. 주리 골짜기 입구에 위치한 다리목은 옥분리·주리·대일리 세 마을 경계에 있다. 마을에 주리천과 신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어 다리목·교목이라 불렸다. 다리목을 지나 골짜기로 들어서면 하촌과 조산이 있다. 하촌은 아래쪽에 있는 마을, 조산(造山)은 성황당에 해당하는 조산무더기가 있었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조산에서 서쪽으로 더 들어가면 가운데 마을 중주가 있고, 골짜기 가장 안쪽에 내주가 있다.

4) 육룡이 나르샤, 육룡소
내주 골짜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주리천은 중주·조산·하촌을 지나 다리목 인근에서 신천에 합류한다. 하촌 북쪽을 지나는 주리천변에 물길 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내린 큰 암벽이 있다. 여기에는 세칭 ‘육룡소 전설’이라 불리는 기이한 전설 하나가 전한다.

주리 개울가에 큰 바위 하나가 비스듬히 서 있다. 이 바위 주변 개울을 사람들은 육룡소(六龍沼)라 불렀다. 아주 먼 옛날 지금의 육룡소 자리에 큰 바위가 있었다. 바위 아래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소가 있었다. 개울 물길을 가로막은 이 바위 탓에 큰 비만 오면 개울물이 넘쳐 마을 논밭이 물에 잠기는 피해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소나기가 쏟아졌다. 이윽고 천둥, 번개가 치더니 갑자기 소가 갈라지면서 용이 하늘로 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여섯 마리 용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여섯 번째 용이 승천할 때 용이 꼬리를 쳐서 물길을 가로막고 있던 바위를 넘어뜨렸다. 이때부터 물길이 열려 논밭이 물에 잠기는 피해가 사라졌다. 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육룡이 승천할 때까지 소에 살면서 마을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것에 대해 보상을 해준 것이라 여겼다. 하천 정비로 인해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동양에서는 용과 관련해 주로 구룡(九龍)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이는 중국 명나라 사람 호승지가 쓴 『진주선』에 소개된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워낙 독특하고 재밌는 스토리다보니 많은 이들이 즐겨 인용했다. 우리나라 대표 실학자 성호 이익도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 ‘용생구자설’을 아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필자 역시 본 지면에 소개한 바가 있다.[용생구자설을 아시나요?(2019.9.26.)] 용생구자설은 용왕이 아홉 용을 낳았는데 이름도 달랐고, 좋아하는 바도 각기 달랐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어 첫째 비희를 시작으로 이문·포뢰·폐안·도철·공복·애자·산예·초도까지 구룡의 이름과 주특기(?)를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문화에 등장하는 여러 형태의 용은 이 용생구자설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용생구자설을 알면 용에 대해서는 마스터했다고 할 수 있다.

5) 에필로그
현재 청정지역 주리에는 먹거리촌과 카페촌이 형성되어 있다.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도심에서 한참 벗어난 이곳 주리 골짜기를 찾고 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주리는 거미줄을 쳐놓고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거미처럼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다. 주리는 정말 ‘거미골’이 맞나보다! 한편 육룡소 전설에 의하면 바위를 제거해준 용은 여섯 번 째 용이었다. 용생구자설에 따르면 육룡은 공복·공하 등으로 불리는 녀석이다. 이 녀석은 물가에 살면서 물길을 통해 들어오는 잡것(?)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주리에 그 흔한 구룡소가 아닌 낯선 육룡소가 있는 것도 용생구자설로 보면 일견 이해가 된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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