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유가읍 남쪽에 도의리가 있다. 지난주에 소개한 한정리를 가기 위해서는 어느 길을 택하든 도의리를 거쳐야 한다. 북쪽 길은 유곡리와 도의리, 남쪽 길은 가천리와 도의리를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도의리는 현풍읍내에서 5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달성소방서, 유가우체국을 지나, 좌측으로 보이는 넓은 들판과 야산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도의리는 문화유적은 적은 편이다. 하지만 넓은 들판에 얽힌 재밌는 전설이 여럿 전한다. 이번에는 도의리 배나무늪에 얽힌 전설과 도산재·떡뫼산에 대한 이야기다.
2) 도의리 자연마을
도의리(道義里)는 북쪽은 유곡리, 동쪽은 가태리, 남쪽은 한정리, 서쪽은 가천리에 둘러싸여 있다. 하늘에서 보면 도의리는 ‘▷’ 모양으로 생겼다. 넓은 서쪽은 비옥한 들판, 좁은 동쪽은 야트막한 야산이다. 도의리 서쪽에 들판이 있는 것은 차천 때문이다. 차천은 현풍천[구천]과 더불어 현풍·유가 땅을 관통하는 대표 하천이다. 달창지에서 시작된 차천은 도의리 서쪽 경계를 남에서 북으로 흘러 현풍읍 파크골프장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도의리는 차천 중류에 형성된 범람원으로 토질이 좋아 논농사 짓기에 아주 적합한 지역이다.
도의리 동쪽 마을 뒷산 기슭에 사배못이 있다. 100여 년 전 큰 홍수 때 지금 사배못 인근에 많은 모래가 쌓였다고 한다. 사배란 말은 마을 뒤편에 모래가 쌓여 ‘사배(沙背)’ 혹은 ‘살피’라 부른 것.[사배못은 1959년 준공됐다] 도의리에는 네 곳의 자연마을이 있다. 사배지 못둑을 바라보고 제일 왼편에 장삼(壯三·張三)이 있다. 고려시대 때 중국에서 온 장씨 성을 지닌 3형제가 터를 잡았다 해 장삼이라 했다. 다른 말로 장새미·도평(道坪)·도의라고도 하며 현 도의1리다. 장삼과 사배지 못 둑 사이에 사배[살피]가 있고, 사배지 상류 못 너머에 못 안쪽 마을이란 뜻의 지내(池內)·못안[모단]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사배와 못안은 현 도의2리다. 사배지 못둑 오른편에는 아홉 물줄기가 마을을 감쌌다 해서 구곡(九谷)·구둣골·구돌골 등으로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현 도의3리다. 논농사를 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도의리. 하지만 제방시설이 열악했던 과거에는 낙동강물이 범람하면 차천 중류인 도의리까지 강물이 올라 왔다. 그래서 과거 이곳에는 큰 늪이 있었다고 한다. 도의리를 대표하는 늪이 바로 도의리 배나무늪[소]이다.
3) 배나무늪[소] 전설
마을전설은 마을의 인문지리적 배경을 잘 반영하고 있다. 지금은 논농사 짓기에 더 할 수 없이 좋은 도의리지만 과거 도의리 들판은 넓은 늪이었다. 그래서일까. 도의리를 대표하는 마을 전설에는 늪과 배나무 이야기가 많다. 도의리 배나무늪 전설 몇 가지를 알아보자.
○ 옛날 도의리에 큰 늪이 있었다.[늪이라고도 하고 소(沼)라고도 한다] 늪 옆에 큰 배나무가 있는 주막이 있었는데 늪에 물이 차면 이 배나무에 뱃줄을 묶곤 했다. 주막에 예쁜 딸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딸 방에 배가 하나 둘 늘어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숨어서 지켜보니 매일 밤마다 늪에서 구렁이 한 마리가 나와 배나무에 달린 배를 따서 딸 방 봉창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주막집 주인에게 알렸고, 주인은 구렁이를 죽여 버렸다. 그날 이후 배나무와 주막집 딸은 둘 다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 옛날 도의리에는 넓고 깊은 배나무늪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배를 타고 늪을 건넜는데 마을입구에 배를 묶어두는 배나무가 있었다. 늪에는 크기가 40-60cm정도 되는 대충이라 불리는 조개가 많았다. 1927년 목충이라는 일본사람이 조개를 잡으러 늪에 들어갔다가 큰 뱀을 보았다. 목충은 뱀을 잡을 요량으로 사냥준비를 해 다시 늪에 들어갔다. 두 시간여 사투 끝에 목충이 뱀을 잡았는데, 길이 3m, 몸 둘레가 60cm나 됐다. 마을 사람들은 목충이 잡은 것은 뱀이 아니라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라 여겼다. 이때부터 늪은 점점 사라지고, 배나무도 말라 죽었다.
○ 어떤 사람이 배나무를 정성껏 키웠다. 어느 날 한 처녀가 나물을 캐러 가다가 탐스럽게 익은 배 하나를 따서 먹었다. 배나무 주인은 배가 고파 하나 따 먹은 것이라 생각하고 못 본 척 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듬해부터 배가 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첫 수확 배를 처녀가 먼저 따먹어 부정을 타서 그렇다고 여겼다. 처녀는 억울한 마음에 배나무에 목을 매 죽었다. 그 뒤로부터 영영 배나무에 배가 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정월 14일 배나무에 제사를 지냈다. 마을사람들은 이를 ‘정신 들인다’고 하는데 정신을 잘못 들이면 집집마다 솥에 금이 갔다고 한다.
우리 고장에는 이와 비슷한 배나무 전설이 여럿 전한다. 구지면 예현리 ‘배나무골’ 전설, 하빈면 ‘계모에게 쫓겨난 손 없는 처녀’ 전설 등이다.
4) 도산재와 떡뫼산
도의리 장삼마을에는 산미(山眉) 곽진(郭 )을 기리는 재실 도산재가 있다. 곽진은 한강 정구 선생과 교류가 있었고 생원시에 합격한 인물로 솔례곽씨 파시조인 청백리공 곽안방의 현손자[고손자]다. 청백리공 곽안방은 곽승양·곽승화·곽승문 3형제를 두었다. 2남 곽승화는 곽위·곽미·곽수 3형제를 두었고, 곽위는 다시 곽지번·곽지견·곽지성·곽지붕·곽지학 5형제를 두었다. 이 중 2남 곽지견이 곽기·곽길·곽진·곽간 4형제를 두었는데, 3남 곽진이 도의리 도산재의 주인공이다. 곽진을 파조로 하는 도의리 산미공파는 현풍곽씨 영남파 33개파 중 한 파를 차지할 정도로 위상이 높다. 참고로 망우당 곽재우는 곽진의 5촌 조카다.
도의리 들판 한 가운데 마치 망망대해에 솟은 작은 섬을 닮은 동산 하나가 있다. 말이 동산이지 해발고도가 35m밖에 되지 않으니 산이라 하기엔 좀 민망하다. 그럼에도 ‘떡뫼산[떡메산·떡매산]’이란 이름이 있다. 이처럼 산이라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도의리 들판에서 조금이라도 솟아오른 것이라곤 오직 이 떡뫼산 뿐이기 때문이다. 떡메란 떡 반죽을 치는 도구로 자루 끝에 뭉툭하게 생긴 나무토막을 박은 것이다. 떡뫼산은 ‘비금도 떡메산’ 유래처럼 마치 떡메가 떡판에 내려앉듯 들판 가운데 내려앉았다거나, 산 모양이 떡메를 닮았다는 것에서 유래됐을 것이다.
5) 에필로그
도의리 입구에 서 있는 마을 표지석에는 도의리 세 글자 옆에 작은 글씨로 ‘충효의 고장’이라 새겨져 있다. 처음 장삼으로 불리던 도의리는 현풍곽씨가 정착하면서 도의 또는 도평이 됐다. 예절을 잘 지킨다는 의미를 담은 마을이름이다. 우리 고장 현풍곽씨 세거지 중에는 이런 식의 마을이름이 몇 곳 있다. ‘예를 잘 따른다’ 해서 솔례(率禮), ‘예를 잘 갖춘다’ 해서 구례(求禮·具禮) 하는 식이다. 5번 국도를 지나면서 넓은 도의리 들판이 시야에 들어오면 매번 드는 생각이 있다. ‘그 옛날 도의리 배나무늪, 주막, 배나무는 어디쯤 있었을까?’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