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10년 전쯤이다. 한 상엿집이 뉴스에 한 동안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에 있던 상엿집이 뜯겨나갈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다는 기사였다. 이는 전통문화에 눈 밝은 몇 몇 연구자들 덕분이었다. 이 상엿집은 2009년 경산시 무학산 자락 (사)나라얼연구소로 이건 되었고, 2010년 ‘경산 상엿집과 관련문서’라는 이름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266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옛 건축물 중 그 수가 극히 드문 것이 상엿집이다. 그런데 전국적으로도 몇 안 되는 상엿집이 대구광역시에 하나 있다. 그것도 우리고장에 있다. 이번에는 달서구 도원동 수밭골 상엿집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2) 옛 영구차 상여
상엿집은 말 그대로 상여를 보관하는 집이다. 상여는 시신을 싣고 장지까지 이동하는데 사용되는 운송장비로 요즘의 영구차에 해당한다. 시신을 싣는 물건이다 보니 사람들은 상여를 가까이 하는 것을 꺼린다. 게다가 상여를 보관하는 상엿집은 어느 마을 할 것 없이 마을 바깥 외딴 곳에 있는 탓에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상엿집 근처에 가는 것을 꺼렸다. 상엿집이 곧 귀신집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상여(喪輿)는 글자 그대로 시신을 싣는 수레다. 가마처럼 여러 사람들이 들고 이동하는데 규모가 작은 것은 10여 명이 들기도 하고, 큰 것은 30-60여 명이 들기도 한다. 다른 말로는 온량거·행상·유거라고도 한다. 상여와 일반 가마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화려한 치장 유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가마도 임금이 타는 연이나 가교는 화려한 치장이 있다. 하지만 기타 평교자[1품관·기로소 당상관 이상]·사인교[정2품 이상]·초헌[종2품 이상]·남여[3품] 같은 가마는 화려한 치장이 없다. 왜 산 사람도 아닌 시신을 장지까지 실어 옮기는 상여를 화려하게 꾸민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와 근거가 있다.
○ 주검을 다루는 도는 장식하지 않으면 보기 싫고, 보기 싫으면 슬프지 않다.[『순자』 「예론」]
○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사람들이 꺼리고,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라 하여 등진다. 그런 까닭에 시신에 옷을 입히고 묶어 이불을 덮어 가리며, 누삽으로 관을 꾸며 사람들로 하여금 꺼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예기』 「단궁하」]
말하자면 주검은 누구나 꺼리는 것이니 꾸미지 않으면 가까이 할 수 없고, 가까이 할 수 없으면 슬픔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옛 사람의 지혜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참고로 우리나라 상여 치장에는 유교·불교·도교·기독교·민속신앙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시종과 양반 꼭두 장식은 유교식, 야차나 단청은 불교식, 소나무나 학은 도교식, 십자가는 기독교식이라 할 수 있다.
3) 상엿집·생이집
50대 초반인 필자 세대만 해도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은 상엿집을 잘 보지 못했다. 필자는 일찍부터 전통문화에 관심이 있은 탓인지 80~90년대에 답사를 다니면서 상엿집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이미 시골마을에는 당집[성황당]은 그런대로 많이 남아 있었지만 상엿집은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근대화·새마을운동·가정의례준칙에 이어 급변하는 생활양식 등의 이유로 우리의 전통장례문화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매장에서 화장으로, 상여 대신 영구차가 등장했다. 이런 이유 등으로 더 이상 상여 멜 일이 없어지자 마을마다 있었던 상여와 상엿집 관리는 소홀해졌고, 어느 순간 상여와 상엿집은 마을의 흉물이 되고 말았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상엿집이 마을경관을 해친다하여 일괄적으로 없앨 필요가 있다는 신문기사도 보인다. 이처럼 상엿집은 하나, 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갔다. 마을주민들조차 상여와 상엿집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무관심했다. 일생동안 가마 한 번 타보지 못했던 우리네 평범한 할아버지·할머니. 그 마지막 가시는 길에 꽃단장 리무진 영구차 역할을 했던 상여와 상엿집은 그렇게 허무하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설화리 옛 상엿집은 지금의 설화리 마을회관과 화원고등학교 사이, 기세리 상엿집은 송해공원 상류 LPG충전소 앞, 인흥마을 상엿집은 조탑무더기 건너편에 있었지만 결국 다 사라졌다.
4) 도원동 수밭골 상엿집
대구는 역시 광역시답다. 없는 게 없다. 80-90년대를 끝으로 우리나라에서 거의 사라진 그 귀한 상엿집이 한 곳 남아 있다. 바로 달서구 도원동 월광수변공원 상류 수밭마을 입구 한 편에 있는 상엿집이다. 수밭골은 500여 년 전 박씨 성을 지닌 한 선비가 개척한 마을로 알려져 있다. 숲이 울창해 숲밭[수전·藪田]이라 불리던 것이 수밭이 되었다한다. 마을입구에 있는 수령 400년의 거대한 마을 수호신 당산 느티나무를 보면 수밭골의 역사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이 상엿집은 수밭마을 위쪽에 있던 것을 250여 년 전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월배 지역에 상여 있는 마을이 드물었다. 그래서 상이 나면 이곳 수밭마을 상여를 빌려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수밭골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예전에는 이곳에 16명이 매는 중형 상여와 32명이 매는 대형 상여가 각각 1대씩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도 어느 때부터인가 관리소홀로 상여는 훼손되고 상엿집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방치되던 상엿집이 2016년 달서구청의 도움으로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그것도 주민들의 증언을 참고하여 이엉지붕을 얹은 옛 상엿집 모습 그대로 보수한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상여와 각종 관련문서 등이 사라지고 찾을 길이 없다는 점이다. 역사에서는 ‘만약이란’ 가설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도 너무 아쉽다. 만약 수밭골 상엿집에 상여와 관련문서들이 남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문화재가 되고도 남았을 것을…
5) 에필로그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승백강(魂昇魄降)’ 현상이 일어난다고 본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에 묻힌다는 말이다. 옛 장례의식에서는 상여가 나갈 때 두 대의 상여가 나간다. 앞쪽에 혼백과 신주를 실은 요여[영거·영여]라는 작은 상여가 서고, 뒤쪽에 체백[주검]을 실은 큰 상여가 선다. 장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체백을 실은 큰 상여는 빈 상태가 된다. 하지만 요여에는 갈 때나 올 때나 똑 같은 물건이 실여있다. 혼백과 신주다. 단, 장지로 갈 때의 신주는 앞면이 비어있는 미완성 신주지만 돌아 올 때는 앞면에 신호(神號)가 작성된 완성품 신주다. 장지에서 평토제를 지낼 때 신주 앞면에 신호를 적어 넣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혼백은 신주를 만들기 전까지 신주를 대신해 영혼을 의지케 하는 기물이다. 옛 예법에 따르면 신주가 있을 때는 초우 혹은 삼우 이후에 혼백을 땅에 묻고, 신주가 없을 때는 대상 이후 묻는다.
수밭골에서는 지금도 매년 동짓날이 되면 옛 상여계를 이은 (사)솔밭회를 중심으로 마을의 번영과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이렇듯 오랜 세월 이어온 전통문화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가치가 있는 법이다.
송은석(대구문화관광해설사)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