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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2만 년 전 구석기인 여기에 잠들다, 조암공원
  • 푸른신문
  • 등록 2021-01-01 01: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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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지난주에 ‘선사시대로(路)’를 테마로 하는 달서구에 있는 선돌공원과 한샘공원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두 공원 인근에 또 다른 선사유적지가 있다. 바로 조암공원이다. 우리 대구의 역사를 5천년에서 2만 년으로 끌어올린 결정적 구석기 유물이 발굴된 곳이다. 아파트단지 조성으로 사라져가는 옛 마을 숫자만큼이나 늘어가는 달서구 선사시대유적지. 이번에는 2만 년 전 구석기인들이 잠들어 있는 조암공원에 대한 이야기다.

2) 대구 역사 2만 년

평소 고고학 유물 발굴과 관련해 궁금한 점이 있었다. ‘왜 유물·유적은 지표면이 아닌 땅 속에서만 나오는 것일까? 왜 맨 아래층에서부터 순서대로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유물이 나오는 것일까?’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오랜 세월에 걸쳐 침식과 퇴적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런대도 뒷시대가 앞 시대를 흙으로 덮고 또 덮는 현상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논리라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 결국 땅 속에 묻히게 된다. 도대체 어디서 그 많은 흙이 와서 이 넓은 땅을 덮는다는 것인지.
이에 대해 고고학을 전공한 달성군청 학예사에게 질문을 했다. 역시 전문가답게 명쾌한 답을 주었다. “수 천 수 만년에 걸쳐 서서히 침식과 퇴적이 일어난다. 이때 문명에 의해 반복적으로 개발된 지역은 유적이 사라지는 것이고, 개발이 되지 않은 유적은 퇴적에 의해 땅 속에 묻히게 된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유물·유적은 그 어떤 이유로든 훼손되지 않은 채 퇴적활동이 진행된 곳으로 보면 된다”
2006년 월성동에서 월드메르디앙 아파트 개발을 하면서 구석기 유물·유적이 발굴됐다. 당시만 해도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은 빗살무늬토기가 나온 북구 서변동, 수성구 상동 등이었다. 이를 토대로 학계에서는 대구 역사를 5천년으로 상정했다. 그런데 월성동 유적에서 13,184점의 구석기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대구 역사는 2만년으로까지 소급될 수 있었다. 현재까지 대구에서 확인된 구석기 유적은 월성동 유적 외에 수성구 파동 신천변 바위그늘[암음·巖陰] 유적이 있다. 바위그늘 유적에서는 구석기시대 토층과 인공이 가해진 자갈돌 등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월성동 유적처럼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구석기 연구에 있어 많은 아쉬움을 남긴 유적이다.

3) 구석기 유물 뗀석기[타제석기]

신석기와 구석기를 구분하는데 있어 지표가 되는 유물이 있다. 구석기 유물로 대표적인 것은 뗀석기과 빗살무늬토기 등이고, 신석기를 대표하는 유물은 간석기와 무문토기 등이다. 지금 40-50대 이상이 되는 기성세대는 뗀석기·간석기라는 용어가 낯설다. 학창시절에 지금의 뗀석기를 타제석기로 간석기를 마제석기로 배웠기 때문이다. 뗀석기는 돌을 쳐서 조각을 떼어낸 석기, 간석기는 돌을 갈아 만든 석기란 뜻이다.
월성동 유적에서는 후기 구석기 유물의 양상을 띤 뗀석기류가 많이 출토되었다. 새기개·좀돌날·긁개·찌르개·망치돌 등이다. 새기개는 주로 나무·뿔·뼈를 자르거나 표면에 자국을 새기는 도구다. 좀돌날은 크기가 작은 돌조각으로 뼈·뿔 등에 홈을 파고 그 틈새에 여러 개의 좀돌날을 끼워서 사용한 일종의 톱·칼 등의 날에 해당한다. 긁개는 가죽이나 나무 표면을 다듬는 도구. 찌르개는 짐승을 죽이거나 가죽에 구멍을 뚫는 도구. 망치돌은 석기제작이나 가죽 벗기기, 땅파기 등에 사용된 도구다. 이중 가장 많은 양이 출토된 것은 좀돌날로 모두 4,888점이다.
요즘의 커터칼이라 할 수 있는 좀돌날은 대표적인 구석기 유물 중 하나다. 인류가 처음 칼을 갖게 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다. 물론 지금과 같은 금속칼이 아니라 돌을 갈아서 날을 세운 돌칼이었다. 뗀석기를 사용한 구석기시대에는 깨뜨려진 돌 중 모서리가 날카로운 것을 골라 조금 다듬어 칼로 썼다. 그런데 중기 구석기시대에 와서 흑요석이란 돌이 등장함으로써 좀돌날·새기개·찌르개 등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2만년 전 구석기인 여기 머물다
구석기 유물이 발굴된 월성동 조암공원


4) 월성동 유적에서 나온 백두산 흑요석

흑요석(黑曜石)은 검을 흑·빛날 요, 글자 그대로 검은 색을 띄는 유리질 성분의 화산석이다. 단단하면서도 유리질 성분이 있어 마치 깨진 유리조각처럼 뾰족하거나 예리한 날을 만드는데 적합한 재료다. 특히 좀돌날·화살촉·긁개·새기개·밀개 등의 재료로 많이 사용됐다.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 중 흑요석이 출토된 곳은 월성동 유적을 포함해 50여 곳이 넘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흑요석 산지로 알려진 곳은 공식적으로 백두산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만 년 전 대구 월성동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흑요석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2017년 1월 국립대구박물관에서 『대구 월성동유적 흑요석 원산지 및 쓴자국 분석』이란 제목의 흥미로운 연구결과물을 내놨다. 이 연구에서 연구진은 ‘레이저절삭 유도결합 플라즈마 질량분석기’를 이용해 월성동 흑요석 357점 중 100점을 대상으로 성분분석을 했다. 분석 결과 놀랍게도 월성동 흑요석이 백두산 흑요석임이 확인됐다. 이미 강원도·충청도·전라도 지역 유적에서 출토된 흑요석도 백두산 흑요석으로 확인된 바가 있다. 백두산과 대구 월성동은 거리가 약 700~800㎞나 된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만 년 전, 월성동 구석기인들이 어떻게 백두산 흑요석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월성동 구석기인들이 백두산에서 직접 채취해 가져왔거나 아니면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교환방식으로 입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서 발굴된 흑요석은 구석기 유물에는 백두산계 흑요석이, 신석기 유물에는 일본 규슈계 흑요석이 많다.

5) 에필로그

어떤 이는 구석기인들에게 있어 흑요석은 ‘멕가이버 칼’과 같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긴 거친 뗀석기를 사용하던 구석기인들에게 있어 ‘유리 칼 흑요석’은 정말 대단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고대 아즈텍 문명 유물 중에도 흑요석이 등장한다. 곤봉이나 몽둥이 표면에 흑요석을 박아 만든 치명적(?) 무기 ‘마쿠아후이틀’이다. 또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는 흑요석을 수술용 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흑요석 외에도 월성동 유물·유적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만 예로 든다면 월성동 유적지가 석기 제작장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제한된 특정지역에서 몸돌[뗀석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돌조각이 떨어져나가고 남은 돌]·격지[몸돌에서 떨어져 나간 돌조각]·망치돌 등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고, 석기제작의 모든 공정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골고루 출토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참고로 월성동 유적에서는 1구역에서 구석기 유물 외 초기 철기 유물이, 2·3구역에서는 청동기, 초기 철기, 조선시대, 근래에 조성된 우물 등의 유물도 함께 확인됐다.

송은석(대구문화관광해설사)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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