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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을 걷다.
  • 푸른신문
  • 등록 2021-01-01 00: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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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매일신문사에서 신라 왕의 길 이란 제목으로 경주 남산의 모든 것을 담은 책이 발간됐다. 신청만 하면 무료로 받아볼 수 있는데 마침 필자가 신청한 책이 어제 도착했다. 처음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책을 읽어보니 신라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신라 천년의 역사는 남산에서 시작해 남산에서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산은 금오산과 고위산 두 봉우리가 합쳐져 타원형을 만들고 있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528년 (법흥왕15년) 이후 남산에는 불국토를 염원하며 골마다 사찰이 들어서 100곳이 넘는 절터 주위에 불상과 석탑이 있고 왕릉과 성터 등 신라유적이 산재해 있어 노천박물관이라고 일컫는다. 마치 보물찾기하듯이 오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물터 나정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담긴 곳이다. 붉은 알에서 태어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태어날 때부터 슬기롭고 총명해서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왕이 된 박혁거세는 서남산에 궁궐을 짓고 13년간 살았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후에 궁궐터에 창림사가 들어섰는데, 현재 창림사지는 삼층석탑만 남아있어 주변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포석정도 남산에 있다. 포석정의 용도는 분분하지만, 신라의 제55대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동안 신라의 연회 장소로만 알려졌으나 포석(砲石)과 제사용 그릇이 출토된 바 있어 경애왕이 연회를 즐기다 죽은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제사를 올리다가 참변을 당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원래 포석사가 신주를 모신 사당이었기 때문에 이런 추측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포석정은 우리나라 사적 제1호이다.
신라의 왕들은 남산에 행차하는 일이 많았다. 신라 21대 소지왕이 정월대보름날 천천정 행차 때의 일이다. 까마귀와 쥐가 소지왕 앞으로 몰려와 울더니 쥐가 사람처럼 말하기를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을 살피시오” 소지왕은 장수에게 까마귀의 뒤를 쫓으라 했더니 한 연못에 이르러 노인이 봉투를 들고 나타나 왕에게 전하라고 한다. 겉봉투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을 것이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에 소지왕은 한사람이 죽는 것이 났다고 생각하고 열지 않으려 했으나 점을 치는 일관이 두 사람은 보통 사람이고 한 사람은 왕이라고 해석했다. 이에 일관의 뜻에 따라 봉투를 열어보니 ‘거문고 갑을 쏘아라’라고 적혀 있었다. 왕은 급히 궁으로 돌아가 거문고 갑을 향해 화살을 쐈는데 그 안에는 왕비와 정을 통한 승려가 숨어 있었다. 자칫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왕비와 승려를 함께 처형함으로써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전해준 연못을 서출지라 부르고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 이라고 해서 찰밥을 해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신라 최초의 석불도 남산에 있다. 장창곡 석조미륵삼존상,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불곡 석불좌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남산에 석불이 많은 이유는 암석의 품질이 우수하여 불상이나 탑을 조각하기가 좋다는 장점이 있다. 또, 내구성이 강한 돌을 ‘영원’, ‘불사’의 관념과 연관시키기에는 안성맞춤의 소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승려들의 수행의 산물로 남산에는 수많은 석불과 석탑이 많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들의 공덕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천년의 역사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신라 남산의 역사와 유물을 오늘날 우리 후손들이 간직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싶다.

이윤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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