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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47.월암동 선돌공원, 대천동 한샘공원
  • 푸른신문
  • 등록 2020-12-25 00:2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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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2018년 8월 3일자 푸른신문 ‘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브리튼 스톤헨지, 진천동 스톤헨지」. 필자는 이 글에서 진천동 입석[사적 제411호]을 세계적인 거석문화재라 할 수 있는 영국의 스톤헨지와 비교해 보았다. 이는 규모나 위상이 아니라 동서양을 불문하고 입석[立石·선돌]이 지닌 문화재적 가치나 의의를 비교해 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고장 달서구는 대구시 8개 구·군중 선사시대유적이 가장 많이 발굴된 지역이다. 이에 달서구는 ‘선사시대로(路)’라는 지역 대표 문화관광상품을 개발해 의욕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번에는 선사시대로 탐방코스 중 한 곳이기도 한 대천동 한샘공원과 월암동 선돌공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2) 선사시대로(路)
역사공부는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구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기록수단인 문자 유무에 따라 문자 발생 이전을 선사(先史)시대, 이후를 역사(歷史)시대라 한다. 책으로 대표되는 문자의 발전은 인류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만약 인류에게 문자가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과 같은 문명사회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조들은 자신들이 체득한 소중한 삶의 지혜를 후손들에게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고, 후손들은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매번 선조들이 겪은 시행착오를 똑같이 되풀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자가 생겨나면서부터 이런 비효율적인 노하우 전수방식은 사라졌다. 문자로 인해 인류는 더 이상 노하우 터득을 위해 삶을 매번 ‘처음’으로 리셋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알고 지내던 방송국 PD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인돌과 선돌을 다룬 적이 있었는데 구성과 편집에서 애를 먹었어요. 암만 봐도 그냥 돌덩이일 뿐인데…” 당연하다. 수 천 년 전의 유물인데다 관련 문자나 기록 없이 돌만 덩그러니 있으니 말이다. 선사시대 유물·유적 연구는 삼국·고려·조선과 같은 역사시대 유물·유적과는 접근방법이 다르다. 오직 눈앞에 남아 있는 돌·흙·토기·뼛조각만을 가지고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유추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별한 접근법에 훈련된 이들이 바로 고고학전공자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그냥 평범한 돌이지만 이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이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고층아파트 사이 한샘공원 회화나무
스톤헨지를 연상케 하는 선돌공원 야외 전시장

3) 선사시대 유적공원, 선돌공원
재개발이 한창인 월암동(月巖洞). 조선시대 때 월배 지역은 지금의 지하철1호선을 기준으로 성서 쪽은 조암방[한때 영암면이라 불린 적도 있다], 앞산 쪽은 월배방으로 불렸다. 근대에 와서 조암방은 조암면이 되었다가 1957년 대구시로 편입되면서 월암이 되었다. 월암은 월배와 조암에서 앞 글자를 따온 것. 조암이라는 지명은 본래 이 지역에 있었던 4개의 큰 바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볏단을 쌓은 것처럼 생겼다 해서 조암(租巖), 낚시를 했다하여 조암(釣巖) 등으로 불렸다.
현재 월암동 431번지 일원에는 선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달서구 대표 문화유산인 선사시대 고인돌·선돌·집자리 등을 주요테마로 한 공원이다. 특별히 이 지역은 2006년 인근 월성동에서 아파트 개발 중 대구 최초로 구석기유적이 발견돼 대구 역사를 5천년에서 무려 2만년으로까지 끌어올린 주역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 야외전시장에는 상인동·월암동·진천동 등에서 발굴된 고인돌·선돌·집자리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권력자의 무덤이며, 선돌은 선사시대인들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 세운 표식 혹은 종교의식의 대상물 등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집자리는 선사시대인들의 거주공간이다. 선돌공원은 선사시대 유물·유적을 주요 테마로 하고 있지만 조경이 잘 되어 있어 가족나들이나 산책코스로도 지역민들에게 인기가 있다.

4) 선사시대+역사시대 유적공원, 한샘공원
선돌공원 인근 대천동에는 한샘공원이 있다. 한샘공원은 그 느낌이 선돌공원과는 사뭇 다르다. 선돌공원이 고층아파트단지를 피해 외곽에 있다면 한샘공원은 고층아파트단지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한샘공원 역시 주요 테마는 ‘선사시대로’다. 하지만 필자는 좀 다르게 접근하고 싶다. 선돌공원이 ‘선사시대로’라면 한샘공원은 ‘역사시대로’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구분은 문자 유무에 달렸다. 선돌공원에 전시된 고인돌·선돌·집자리는 문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유물·유적이다. 오직 눈앞에 보이는 돌과 흙만으로 선사시대 문화를 유추하고, 선사시대인들과 소통한다. 하지만 한샘공원은 좀 다르다. 필자가 한샘공원에서 주목하는 것은 선사시대 유물·유적이 아니라, 공원 한 편에 있는 옛 한샘마을 당산목인 수령 350년 회화나무 두 그루다.
회화나무 앞쪽에는 이곳이 옛 한샘마을터였음을 알리는 ‘한샘(대천동)유허비’가 있다. 지금의 대천동 일대는 이 회화나무와 곁에 있는 팽나무·느티나무 노거수를 제외하고는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400년 내력을 지닌 대천동이 불과 십 수 년 만에 천지개벽, 상전벽해를 한 것. 하지만 대천동의 과거는 선사가 아닌 역사다. 마을의 내력이 문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샘(대천동)유허비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대천동은 그 역사가 약 400년이며 마을 남쪽에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큰 샘[한샘]이 있어 한샘 혹은 대천(大泉)이라 불렀다. 한 때 100여 가구에 400여 명이 거주했으나 1970년대 근대화로 마을 위쪽 농토가 공장지대와 집단주거지역으로 변했고, 2005년에는 마을까지 사라져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에 대천마을 유래를 돌에 새겨 마을 수호신 회화나무 아래에 세우니 후세들도 이 터전이 주는 큰 뜻과 조상님들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대천동 주민들은 1978년까지 이 회화나무 당산목에서 동제를 지냈으며, ‘9정자 2암’이라 하여 이곳에 아홉 그루의 노거수와 널찍한 바위 2개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회화나무 두 그루, 팽나무 한 그루, 느티나무 한 그루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5) 에필로그
상인·진천·유천·대천·월암·월성 일대에서는 1980년대에는 청동기유적이, 2003년 이후부터는 신석기·구석기 유적이 확인됐다. 지리학에서는 이 지역을 ‘월배선상지’라 한다. 선상지(扇狀地)는 산에서부터 시작된 물길이 평지를 만나 흐름이 느려지면서 물과 함께 쓸려온 토사가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펼쳐지면서 쌓인 지형을 말한다. 월배 선상지는 달비골에서 발원한 진천천에 의해 생겨난 지형으로 지금의 상인동 채정마을이 선상지의 시작점, 상인·진천이 중앙부, 유천·대천·월암·월성이 말단부에 해당한다. 시간은 수 천 수 만 년이 흘렀지만 사람 살기 좋은 터는 역시 변함이 없나보다. 빈틈없이 빼곡하게 들어선 이 지역 아파트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송은석(대구문화관광해설사)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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