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거나 본적이 있을 것이다. 옛날 TV프로그램 ‘전설의 고향’에서 귀신이 나타날만한 타이밍이 되면 곧잘 클로우즈업 되던 이미지가 있었다. 툭 불어진 눈망울과 코, 삐죽삐죽 삐져나온 이빨, 험상궂기 그지없는 장승 얼굴이었다. 이제 곧 귀신이 등장할 것이니 시청자들로 하여금 놀랄 준비를 하라는 신호였다. 어린 시절 시골마을에서는 이런 장승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지금 보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모습인데 그 시절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특히 보름달이 뜬 밤에는 웬만한 담력이 아니고서는 어린 아이 혼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앞을 지나가지 못했다. 우리고장에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아닌 돌로 만든 석장승이 하나 있다. 여러 자료에서 대구지역 유일의 석장승이라고 하는데 필자가 알기로 그렇지는 않다. 이번에는 대구시민속자료 제2호로 등재된 신당동 석장승에 대한 이야기다.
2) 명관치장승설화(名官治長丞說話)
명관치장승설화는 명판관이 장승을 상대로 재판을 하는 이야기다. 다른 말로 ‘장승재판’ 혹은 ‘망두석재판’이라고도 한다. 제 아무리 이름난 판관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장승을 상대로 재판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아주 먼 옛날에는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의 『효빈잡기』·『매옹문록』·『청구야담』 등에 이 설화가 소개되어 있고, 포청천으로 잘 알려진 중국의 『포공기안』에도 비슷한 스토리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비단장수가 장승에 기대어 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한참 후 잠에서 깬 비단장수는 자신의 비단보따리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비단장수는 고을 판관을 찾아가 자신의 비단보따리를 찾아달라고 애원했다. 마침 그 고을 판관은 현명한 판결로 이름난 명판관이었다. 판관은 장승이 의심스럽다며 장승을 끌고 와 매질을 하며 장승에게 비단을 내놓으라며 윽박질렀다. 판관이 말 못하는 장승을 상대로 매질하며 비단을 내놓으라고 하는 해괴한 상황이 벌어지자 고을민들이 이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때 판관은 장승을 취조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하니, 벌을 받지 않으려면 비단 한 필씩을 바치라고 했다. 이때 고을민이 바친 비단 중에 비단장수가 잃어버린 비단이 있었다. 판관은 범인을 잡았고 비단장수는 잃어버렸던 자신의 비단을 되찾았다.
3) 장승·장생·장성·벅수·법수·미륵
장승은 나무나 돌에 사람 형상을 새겨 마을입구나 길가에 세워둔 것이다. 나무로 만든 것은 목장승, 돌로 만든 것은 석장승이라 한다. 장승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사찰이나 특정 공간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표식, 거리나 방향을 표시하는 이정표 등의 역할을 했다. 장승은 일반적으로 남녀 한 쌍이 세워지는데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이 대표적이다.
장승은 명칭이 다양하다. 신라·고려시대에는 장생·장생표주·국장생·황장생 등으로, 조선시대에는 장승·장생우·후·장성·장선주 등으로 불렸다. 이외에도 벅수·벅시·법수·수막살이·수살이·돌미륵·돌하르방 등으로도 불리는데, 지금은 주로 장승·장성·장신·벅수·벅시 등으로 불린다.
장승은 여러 기원설이 있다. 고유민속기원설은 고대의 남근숭배사상, 토지 경계표시, 솟대, 선돌, 서낭당 등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고, 비교민속기원설은 퉁구스 기원설, 남방 벼농사 기원설, 환태평양 기원설 등이다.
장승은 크게 목장승과 석장승이 있다. 나무로 만든 목장승은 나무 장대에 새 조각을 올려놓은 솟대형과 통나무에 사람형상을 그리거나 조각한 형태가 있다. 석장승은 길쭉한 형태의 돌 하나를 세워 둔 선돌형, 돌무더기형, 비석형이 있고, 사람형상을 조각한 석인형도 있다. 목장승·석장승을 불문하고 장승의 얼굴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대체로 남장승은 머리에 관모를 쓰고 툭 불거진 눈에 덧니와 수염을 달고 있고, 여장승은 관모 없이 얼굴에 연지·곤지가 찍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장승은 마을 수호신·경계표·이정표 등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장승이 자식을 기원하는 기자신앙과 동시에 낙태를 바라는 행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자식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장승의 코를 만지거나 장승에 기원했고, 반대로 낙태를 원할 때는 장승의 코나 눈을 갈아내 감초와 섞어 삶은 물을 마시는 민간비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국에 산재한 많은 장승들의 코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아주 오랜 세월동안 이런 행위가 민간신앙과 비방으로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1999년 국립민속박물관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540여 장승유적지가 있다고 한다.
4) 양산골 지킴이 신당동 석장승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동편 숲 속에 석장승 1기가 있다. 바로 신당동 석장승이다. 계명대학교가 들어서기 전 이 지역에는 양산골로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 양산골에는 절이 하나 있었는데 절 입구에 이 석장승이 서 있었다고 한다. 양산골 주민들은 예로부터 이 석장승을 ‘장군’ 또는 ‘정승비’라 불렀으며, 본래는 2기였을 것이라고 한다. 양산골에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전한다.
아주 오랜 옛날 이 마을에 두 정승이 살았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두 정승은 서로 싸우다가 하나는 죽고 하나만 살아남았다. 이때 살아남은 정승이 지금의 석장승이다.
신당동 석장승은 키 140㎝, 둘레 95㎝로 직사각형 화강석을 다듬어 조성했다. 머리에 관모를 쓴 남장승으로 반달형 눈썹, 올라간 입 고리, 두툼한 볼 살 등, 얼굴표정이 험악하지 않고 후덕한 인상을 하고 있다. 두 팔은 가슴 쪽에 모아져 있으며, 오른쪽으로 약간 기운 길쭉한 봉 형태의 물건을 두 손으로 쥐고 있다. 손에 쥔 물건이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문·무인석이 들고 있는 홀이나 검은 아닌 것 같다. 남근숭배사상으로 보면 남근 같기도 하고 미륵으로 보면 보살이 들고 있는 지물 같기도 하다.
계명대학교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이 석장승에는 양산골만이 아니라 인근 다른 동네에서도 정월 보름이나 섣달 그믐날이면 찾아와 제물을 차리고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석장승 앞에 붙은 신당동은 현재 석장승이 서 있는 주소명이다. 양산골 석장승이 신당동 석장승이 된 셈이다.
5) 에필로그
장승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변강쇠’가 떠오른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변강쇠는 말로가 영 시원찮았다. 부인 옹녀의 심부름으로 마을입구에 서 있는 장승을 빼내 땔감으로 썼다가 그만 동티가 나 급살했기 때문이다. 변강쇠 같은 막무가내 사내도 장승 동티만큼은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 해도 장승에 대한 우리네 조상들의 오랜 믿음을 미신으로 치부하며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참! 계명대 동문 앞과 석장승 뒤편 안내판에 명칭이 ‘석장승(石長栍 )’으로 되어 있다. 석장승(石長丞) 또는 석장생(石長栍)이라야 맞다.
송은석(대구문화관광해설사)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