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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45. 의로운 누이 이랑, 의자이랑지묘
  • 푸른신문
  • 등록 2020-12-10 12: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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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음력 10월은 묘사시즌이다. 일 년 내내 별 만남 없이 보내다가도 이맘때만 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문중원들이 모인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제각각 바쁘게 살면서, 특히 금년은 코로나19로 생활의 어려움은 물론 사회활동에 엄청난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묘사는 행해졌다. 음력 10월 한 달 동안 선조별로 날짜를 정해 행해지는 묘사. 묘사는 어제, 오늘 만들어진 문화가 아니다. 수 백 년 세월동안 대대손손 이어져온 전통문화다. 하지만 묘사문화도 조만간 큰 변화가 있을 것 같다. 계승되든지, 소멸되든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묘사가 생겨날지. 하긴 묘사 때마다 파묘 터나 묵은 묘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을 보면 이미 묘사문화에 변화가 시작된 것 같다. 이번에는 가창면 냉천리에 있는 12살 소녀의 묘소, ‘의자이랑지묘(義姊李娘之墓)’에 대한 이야기다.

2) 의로운 개 무덤, 의구총(義狗冢)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학창시절 방학 탐구생활 교재에 의로운 개에 대한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화재로부터 주인을 구하고 죽은 개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후로 소에 대한 비슷한 내용도 접했던 것 같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분명 감동적이기는 한데 뭔가 좀 부족한 감이 있다. 아마도 사실이 아닌 꾸며낸 이야기 같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허구보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논픽션 소설이 독자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것처럼.
‘의구총’ 스토리는 사실이다. 전국적으로 여러 사례가 있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북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에 있는 의구총[경북 민속자료 제105호]이다. 이 스토리는 1629년(인조 7) 선산부사 안응창이 지은 『의열도』 「의구전」에 전한다. 의구총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선산부 동쪽 연향에 사는 한 역참 아전이 누른빛이 도는 개 한 마리 길렀다. 영리한 이 누렁이는 주인을 잘 따랐다. 하루는 아전이 옆 동네에 놀러 갔다가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월파정 북쪽 큰길에서 말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다. 이때 들판에 큰 불이 났다. 누렁이는 수백 보 거리의 낙동강까지 달려가 꼬리에 물을 적인 후 돌아와 불끄기를 반복했다. 결국 누렁이는 불을 끄고 주인 곁에서 죽었다. 주인이 술에서 깨어나 주변을 보니 들판에 화재가 있었고, 자신 곁에 꼬리가 심하게 그을린 채 죽어 있는 누렁이를 발견했다. 주인은 누렁이가 자신을 구해준 사실을 알고는 고마움에 묘를 만들어 장사를 치러주었다. 훗날 사람들이 누렁이가 죽은 곳을 구분방(狗墳坊·개무덤 동네)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길가에 의구총이라 불리는 누렁이 무덤이 있다.

1994년 선산군은 한 동안 길가에 방치되어 있던 의구총을 새롭게 정비했다. 봉분은 직경 2m, 높이 1.1m이며, 봉분 뒤편에는 의구 누렁이의 스토리를 4장의 돌에 새긴 석판이 있다. 이 그림의 원본은 1685년(숙종 11) 어느 화공이 그린 4폭의 의구도라 한다. 한편 이 마을 구전에 의하면 누렁이의 주인인 역참 아전은 노성원, 혹은 김성발이라고 한다.

3) 화마로부터 남동생을 살린 12살 소녀 이랑
개나 소도 이러할진대 사람은 오죽할까. 우리고장에는 의구총보다 더 감동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는 묘가 하나 있다. 가창면 냉천리 주암산수양관 가는 길에 있는 ‘의자이랑지묘’다. 의자이랑지묘는 ‘의로운 누이 이랑의 묘’라는 뜻. 대체 이곳에는 무슨 사연이 담겨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인 1834년(순조 34). 이 마을에 이씨 성을 지닌 12살 소녀가 살았다. 하루는 몸이 불편한 채로 일을 나간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가 죽을 쑤어 집을 나간 사이, 집에 불이 났다. 삽시간에 집안전체가 화마에 휩싸였다. 소녀 이랑은 불길을 피해 탈출할 수 있었지만 방안에 젖먹이 남동생이 자고 있었다. 이랑은 젖먹이 남동생을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이랑은 남동생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 안고 그렇게 화마를 버텼다. 불길이 잡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엎드린 체 불에 그슬린 딸의 시신 아래에서 젖먹이 아들을 발견했다. 12살 누이는 죽었지만 대신 젖먹이 남동생은 살아남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당시 대구판관 조종순은 소녀 이랑의 의로운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묘 앞에 비석을 세워주었다. 지금 가창면 냉천리에 있는 ‘의자이랑지묘비’가 그것이다.

본래 이 묘는 현 위치 동쪽 가창 국도 변에 있었는데 2002년 도로확장 때 현 위치[냉천리 182]로 옮겨졌다. 참고로 의자이랑지묘 스토리에 연도 오류가 보인다. 대부분 자료에는 이랑의 일이 1834년에 있었고, 당시 대구판관 조종순이 비를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확인을 해보니 조종순이 대구판관으로 있었던 시기는 1824년 12월에서 1827년 12월까지다.

4) 가창면 냉천리 의자이랑지묘(義姊李娘之墓)
주암산수양관 가는 좁은 산길 좌측에 자리한 이랑지묘 입구에는 달성군에서 세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 바로 뒤편에 묘소가 있는데 안내판을 발견하지 못하면 묘소 찾기가 쉽지 않다. 10여 평 남짓한 묘소에는 작은 봉분이 있고 봉분 앞쪽에 대구판관 조종순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묘비가 있다. 묘비 전면에는 ‘의자이랑지묘’라 새겨져 있고, 그 좌우에 소녀의 의로운 죽음을 위로하고 칭송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 측면에는 1924년 3월 3일 가창면에서 비를 다시 세웠다는 내용도 새겨져 있다. 참고로 비문에 보이는 ‘감라’는 12세 어린 나이에 진시황의 책사로 활약한 중국 인물이다.

의자이랑지묘(義姊李娘之墓)
기령(甘羅其齡) 감라의 나이(12살)
에섭앵내지(聶嫈乃志) 수줍게 소곤거리던 그
대제이사(代弟而死) 동생을 대신해 죽은 것은
위친지사(爲親之嗣) 어버이의 대를 잇기 위함이라

5) 에필로그
의자이랑지묘에 새겨진 추모글을 보노라면 한편으론 흐뭇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비는 조선후기인 1800년 대 초에 조성된 것이다. 물론 지금의 것은 1924년 새로 조성한 것이지만 비문은 처음 것을 그대로 사용했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한 번 보자. 爲親之嗣, 어버이 대를 잇기 위함이라. 전체 16글자 중 유독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한 글자가 여기에 있다. 맨 마지막 글자 ‘嗣’. 이 글자는 대를 잇는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글자다. 글의 주된 내용은 12살 소녀 이랑의 죽음을 칭송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글의 방점은 다른 데 있다. 이랑이 의로운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들인 남동생을 살려 어버이의 대를 잇고자 했다는 것.
역사는 당시 시각으로 바라봐야 정확한 이해가 가능하다. 아들로 손자로 이어지는 대물림이 효의 출발이었던 당시로서는 이랑의 행동이 분명 칭송받을만한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 비문을 보면 씁쓸한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이랑 스토리는 1871년 발행된 『달성군지』 「이적」조에 ‘의자비(義姊碑)’로 등재되어 있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송은석(대구문화관광해설사)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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