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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43. 무덤에서 나온 400년 전 편지 172매, 현풍곽씨 언간(1)
  • 푸른신문
  • 등록 2020-11-26 13: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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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한국판 ‘사랑과 영혼’으로 알려진 ‘원이엄마’이야기를 아시는지? 원이엄마 스토리는 1998년 4월 경북 안동에서 분묘 이장 중 한 남성의 관 속에서 나온 편지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400여 년 전에 작성된 이 편지는 31세 젊은 나이로 요절한 남편 이응태에게 부인이 직접 한글로 쓴 것이다. 관 속에서 다른 편지 몇 장과 함께 부인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으로 삼은 미투리도 함께 출토됐다. 편지글 중에 자식을 ‘원이’라고 지칭한 부분이 있어 이 편지를 ‘원이엄마 편지’라 한다. 구구절절 부부애를 서술한 문장이 얼마나 애틋한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히고 있다.
우리고장에도 이와 유사한 편지가 있다. 400년 전 한 선비와 부인이 주고받은 한글편지로 분량이 102매나 된다. ‘원이엄마 편지’와는 반대로 남편이 부인에게 보낸 한글편지다. 이번에는 2회에 걸쳐 우리고장에서 출토되어 국가민속문화재 제229호로 등재된 ‘하씨부인 묘 출토 현풍곽씨 언간’에 대해 알아보자. 언간(諺簡)은 한글편지란 뜻이다.

현풍 소례에 있는 곽주의 재실 유연재

2) 미라와 함께 출토된 400년 전 편지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1989년 4월 4일.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뒷산 석문산성 내에서 몇 명의 남자들이 묘 이장 작업을 시작했다. 묘의 주인은 현풍곽씨 곽주의 부인 진주하씨. 이장에 참여한 문중원들과 인부들은 하루면 될 작업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날은 달랐다. 봉분을 걷어내고 ‘곽(槨)’은 열었는데 ‘관’이 도저히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우리 전통 치장법은 땅 속에 관을 에워싸는 곽을 먼저 짜 넣고 그 안에 관을 넣는다] 곽 덮개에는 ‘진주하씨지묘’라 쓴 400년 전 명정이 마치 어제 것처럼 덮여 있었다.
작업에 참여한 이들은 결국 관 열기를 포기하고 다음날 다시 인원과 장비를 보충해 관 열기를 시도했다. 몇 시간에 걸친 시도 끝에 겨우 관 덮개를 열었다. 그런데 이때 신기한 현상이 있었다. 관 속에서 흰 구름 같은 하얀 김이 새어나왔던 것. 당시 현장 동영상을 편집한 문화재청 영상자료에는 작업에 참여한 하씨 부인의 12세손 곽병도씨가 그 김을 쐬고 5분정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인터뷰가 담겨 있다.
놀랍게도 관 속에서 미라 상태의 하씨 부인 시신과 함께 여러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 장의 4, 창의 1, 저고리 9, 치마 2, 버선 18, 속곳 14, 바지(여) 3, 요 2, 이불 3, 배개, 명목, 모자, 돗자리, 빗접과 틀 각 1, 옷감 10, 파손된 옷 10여 점, 조발낭[손톱과 머리카락을 담은 주머니] 등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지에 붓으로 쓴 많은 양의 편지 뭉치가 함께 출토된 것이었다.
편지는 모두 172매로 한글 편지 167매, 한문 편지 5매다. 편지는 곽주가 부인 하씨에게 쓴 것이 96매로 가장 많고, 출가한 딸들이 어머니께 쓴 것이 42매, 하씨가 곽주에게 쓴 것이 6매, 기타 출가한 딸들이 시누이에게, 아들이 어머니에게, 안사돈 간에 주고받은 편지 등이다. 편지내용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파묘터를 아낸해 준 후손 곽정섭 씨가 파묘터를 손보고 있다

3) 곽주, 진주하씨 부인 그리고 장남 곽이창
곽주[郭澍·1569~1617]는 현풍곽씨 19세(世)로 자는 경림, 호는 소계(蘇溪), 현풍 소례마을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고 내·외직을 두루 거친 후 호조참의와 승지를 지낸 만심재 곽규로 현곽팔주(玄郭八走) 중 한 분으로 이양서원에 제향된 인물이다. 아버지는 문장과 글씨로 이름난 노탄 곽삼길. 곽주는 어려서 대암 박성에게 배우고, 자라서는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행으로 『현풍군지』에도 올랐다.
곽주의 첫 번째 부인은 광주 이씨로 육일헌 이홍량의 딸이다. 그녀는 곽주와의 사이에서 장남 곽이창만을 놓고 일찍 세상을 떴다. 두 번째 부인 진주 하씨는 참의공 하준의의 딸로 그녀가 바로 172매의 편지를 쏟아낸 묘 주인이다. 진주 하씨는 곽주와의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다. 이렇게 해서 곽주는 광주 이씨·진주 하씨 두 부인 사이에서 모두 4남5녀를 두었다. 이 중 장남 곽이창만이 광주 이씨의 소생이고, 나머지 곽의창·곽유창·곽형창을 포함한 복녜·덕녜·철녜·정냥·정렬이는 모두 진주 하씨 소생이다.[자료에 의하면 본래 5남6녀인데, 2명은 일찍 죽었다고 한다]
장남 곽이창은 자가 덕무 호는 모현재(慕賢齋)다. 한강 정구와 현풍현감을 지낸 동명 김세렴에게 수학했다. 학문과 덕행이 높아 조정에서 참봉벼슬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곽주 집안에서는 장남 곽이창이 트러블메이커(?)였던 모양이다.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진주 하씨 묘에서 172매의 편지가 나오게 된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이가 바로 곽이창이였다는 것.
곽이창의 아버지 곽주는 벼슬살이·타향살이를 하지 않고 평생 고향 소례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조선 전기만 해도 우리나라는 남자가 처가곳으로 장가가서 사는 예가 많았다. 하지만 곽주가 살았던 17세기 직후쯤 되면 여자가 시댁으로 시집오는 문화가 어느 정도 정착됐다. 여하튼 처가살이를 하든 시댁살이를 하든 간에 분명했던 것은 부부가 한집에서 같이 살았다는 것이다.
진주 하씨의 고향은 소례와 그리 멀지 않은 창녕군 이방면 오야마을이다. 그녀는 곽주와 혼인하면서 시댁인 소례에서 첫 살림을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부부가 한집에 같이 살면서 그처럼 많은 양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 말이다. 다행이 172매 편지 중에 그 의문을 풀어주는 편지가 있었다. 전처 소생 곽이창과 후처 진주 하씨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곽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관계는 편치 않았다. 결국 곽주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별거’를 결정했다. 논공[지금의 달성공단]에 하씨 부인의 거처를 별도로 마련, 부부가 각각 떨어져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두 사람 간에 102매의 편지가 생산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곽주가 진주 하씨에게 보낸 편지가 96매인데 반해, 하씨가 곽주에게 보낸 편지는 6매에 불과하다는 점이다.[6매 중 4매는 확실하고 2매는 추정] 물론 출토된 172매의 편지가 모두 진주 하씨 묘에서 나온 것인 만큼, 편지 대부분이 진주 하씨가 수신인으로 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래도 이왕이면 하씨 부인이 곽주에게 쓴 편지가 좀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쩌면 곽주도 부인의 편지를 소중하게 모아두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400년 세월동안 그 편지들이 사라지지 않고 후손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아무도 모르게 400년 동안 땅 속에 묻혀있다 출토된 하씨 부인의 편지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4) 에필로그
‘현풍곽씨언간’에는 정말 별의별 이야기들이 다 있다. 곽주와 곽이창이 절에서 공부하는 이야기, 곽주와 곽이창이 함께 과거길에 나서는 이야기, 도동서원에서 제사 지내는 이야기, 손님접대 방법에 대한 이야기, 출산을 앞두고 부인에게 당부하는 이야기, 아들의 관례, 각종 질병에 대처하는 이야기, 여종의 죽음을 위로하는 이야기, 가족의 화목을 당부하는 이야기 등등이다.
[다음호에 계속]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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