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올 가을 대구시민들은 복을 받았다. 대구 단풍이 전국에서 제일 예쁘다고 한다. 지금 대구는 도심공원, 가로수는 말할 것도 없고 아파트 내에서도 기막히게 예쁜 단풍을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올해는 팔공산 단풍이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 엄청난 인파가 대구를 찾고 있다. 가을신이 코로나로 고생한 대구시민에게 주는 선물인 듯하다. 팔공산과 함께 대구를 대표하는 산 비슬산. 비슬산의 대표사찰 유가사로 가는 길목인 음동 계곡 가에 유서 깊은 옛집이 하나 있다. 차창 밖을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고 마는 정말 작은 집이다. 이번에는 이애정(二愛亭)이라 불리는 이 작은 집과 이 집에서 살다간 한 선비에 대한 이야기다.
2) 요산요수(樂山樂水)
학창시절 한문시험에 단골로 출제되는 문제유형 있었다. 음이 여러 가지로 나는 한자에 대한 문제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문제가 있다. ‘요산요수(樂山樂水)’ 워낙 유명한 문제다보니 이 문제는 학생들에게 그냥 기본점수를 주기 위한 문제였던 것 같다. 한자 ‘樂’은 ‘즐길 낙’, ‘좋아할 요’, ‘음악 악’처럼 여러 음을 지닌 글자다.
요산요수란 말은 『논어』 「옹야」에 나오는 말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니,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고 어진사람은 정적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진사람은 오래 산다”
성인의 말씀. 곰곰이 생각해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든 콸콸 쏟아지는 폭포수든 간에 물가에 있을 때와 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감회는 분명 다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물가에 있을 때는 미시적 관점이 주가 된다면 산에 있을 때는 거시적 관점이 주가 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물가에서는 이공계열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산정에서는 인문계열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나 할까. 공자도 태산에 올라 “登泰山而小天下處[등태산이소천하처·태산에 올라와 보니 세상이 작구나]”라 하지 않았던가.
3) 한말 큰 스승 계암 성기덕
사효자굴(四孝子窟). 예전에 본 지면에서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다. 사효자굴 인근 구천 계곡 변에 돌담에 둘러싸인 작은 집이 한 채 있다. 차를 타고 비슬산 쪽으로 올라간다면 좌측 계곡 아래쪽이다. 흙돌담이 아닌 오직 돌로만 쌓은 돌담에다 주변에서 잘 보기 힘든 우진각지붕 양식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집이 바로 이애정이다.
이애정은 한말 우리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한 선비의 집이다. 계암(溪菴) 성기덕[成耆悳·1884~1974]. 선생은 창녕에서 태어나 우리 고장에서 활발하게 강학활동을 한 유학자이자 항일애국지사였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 학산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인심 좋은 곳에서 학문에 전념하라”는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37세 때인 1920년 달성군 유가읍 본말리에 계암서당을 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31년 48세 때 다시 거처를 옮겼으니 유가읍 음리 구천[현풍천]변 지금의 자리다.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지금의 이애정이 완성되기까지는 무려 2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선생께서 손수 돌을 날라 돌담과 정원 등을 꾸몄기 때문이다. 이애정은 정서향집으로 단정하게 쌓아올린 방형 돌담에 둘러 싸여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우진각 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좌우 각각 반 칸과 한 칸 퇴를 두었다. 도로변에서 내려다보면 비슷한 모양의 집이 두 채가 보이는데 멀리 뒤쪽에 보이는 집이 이애정이다.
선생은 7세에 주세충, 17세에 한말 영남의 큰 스승으로 불렸던 심재 조긍섭과 소눌 노상직 문하에서 수학했다. 달성군으로 거처를 옮긴 30대 후반부터는 강학활동에 전념해 제자만 무려 1천여 명에 달했다. 일제강점기를 살아온 선생은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선비로서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일제가 양력설을 강요하자 오히려 선생은 서당 벽에 단군연호를 붙여 놓고 제자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웠다. 광복 이후에는 대구사범학교에11서 성도산 선생과 함께 통감 형식의 『조선역사』를 지어 제자를 가르쳤다. 선생은 이러한 민족주의사관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는 일경에 체포되는 등의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1974년 4월 1일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난 선생의 장례는 유림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장례에는 전국에서 모인 유림과 조문객의 행렬이 무려 3km나 이어졌다고 한다.
4) 이 둘을 사랑하노라
선생은 48세 때 유가읍 본말리에서 현 음리로 거처를 옮겨, 무려 20여 년 간 공을 들인 끝에 지금의 이애정을 완성했다. 옛 사람들, 특히 선비들은 자신이 거처하는 공간에 이름 붙이기를 즐겼다. 당호니, 재호니 하는 것인데 자신의 철학이나 신념을 1-2글자에 압축해서 담았다. 계암 성기덕 선생은 어떤 의미로 자신의 집에다 이애정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필자도 정확한 내력은 모른다. 「이애정기」나 선생의 문집인 『계암문집』을 확인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접해보지 못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이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다. 상상을 나래를 펴고, 추론 해보는 수밖에.
이애정은 ‘두 가지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비슬산 자락 구천 계곡 변에 자리한 이애정과 이애정의 주인 성리학자 성기덕 선생. 둘 간의 관련성을 찾다보니 요산요수에 주목하게 된다. 이애정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가에 자리한 ‘요수형’ 정자도 아니요,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비슬산정에 자리한 ‘요산형’ 정자도 아니다. 물도 적당히 산도 적당히 즐길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 정자다. 이애정은 요산요수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유교에서는 중용이 곧 성인의 자세라 한다. 계암 선생은 이곳에서 요산과 요수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가르침을 실천하려했던 것은 아닐까? 중용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알고 안 되는 것인지도 알지만 그래도 한 번 도전해 보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도 사랑하고 산도 사랑하리라’
5) 에필로그
이애정 북서쪽 담장 너머에 숨은 보물이 하나 있다. 바로 상성폭포다. 골이 그리 깊지 않은 탓에 폭포의 높이도 그렇게 높지는 않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대구의 명산 비슬산 자락 폭포인 만큼 이름값은 한다. 한 여름이면 상성폭포 위, 아래 좋은 목은 더위를 피해 찾아온 사람들로 제법 북적인다. 대부분 이 지역에 밝은 지역민들이다. 100년 전 계암 선생이 이곳을 찾아 요산요수, 이애정을 경영했던 것처럼 지금 사람들도 요산요수하는 마음은 매 한가지인가 보다.
송 은 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