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차를 타고 다사읍 서재리에서 대구 북구 방면으로 가다보면 좌측 금호강을 따라 몇 개의 다리를 지나치게 된다. 이 중 첫 번째 만나는 다리가 방천리와 박곡리를 잇는 해랑교다. 250만 대구시민 중에 이 해랑교를 알고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글쎄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10%쯤 될까싶다.
대구 북쪽을 통과하는 40여km 금호강 물길에는 (고속)도로·철로·지상철로 등 모두 27개의 다리가 있다. 이중 가장 독특한 이름을 지닌 다리가 해랑교다. 해랑교는 지역 명에 근거한 대부분의 우리나라 다리와는 좀 다르다. 사람 이름에 근거했다고도 할 수 있고, 마을 이름 혹은 전설에 근거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번에는 대구에서 가장 예쁜 다리 이름을 지닌 우리 고장 해랑교(海娘橋)에 대해 알아보자.
2) 해랑 전설
어느 때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다. 여하튼 먼 옛날이란다. 동해 바닷가에서 남편 없이 홀로 외동딸을 키우던 한 여인이 해랑교 인근마을인 박곡리에 정착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작은 주막을 열어 오가는 뱃사람과 길손에게 정을 베풀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해랑 어멈이라 불렀다. 그녀의 외동딸 이름이 해랑이었기 때문이다.
해랑 어멈은 열심히 주막을 운영해 해랑이를 잘 키워 시집보냈다. 해랑이가 출가한 뒤에도 해랑 어멈은 홀로 주막을 운영하며 적적한 마음을 달랬다. 그러던 중 해랑 어멈은 금호강 건너편 마을에 사는 한 홀아비를 알게 됐다.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이 되면 금호강을 건너 정을 나눴다. 어떤 날은 해랑 어멈이 강물을 건너고 또 어떤 날은 홀아비가 물을 건넜다.
해랑이는 밤이 되면 남몰래 길을 나서는 어머니가 이상했다. 어느 날 해랑이는 어머니 몰래 어머니 뒤를 따라갔다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됐다. 집으로 돌아온 해랑이는 이 문제를 남편과 상의했다. 해랑 부부는 추운 날씨에 금호강을 건너는 어머니와 강 건너 홀아비를 위해 돌다리를 놓기로 하고, 남들의 눈을 피해 매일 밤 돌다리를 놓았다. 며칠이 지난 후, 마을 앞 금호강에 전에 없던 돌다리가 완성됐다. 해랑 어멈도 홀아비도 박곡리·방천리 사람들도 이상한 일이라며 신기해했다. 두 마을사람들은 이 다리를 며칠 밤사이에 도깨비가 놓은 다리, 도깨비 징검다리라 불렀다. 하지만 해랑 어멈은 그 징검다리를 누가 놓은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해랑 부부가 놓은 도깨비 징검다리 덕분일까. 해랑 어멈은 강 건너 홀아비와 부부의 연을 맺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해랑포는 해랑 어멈의 주막이 있었다고 전해지던 곳으로 지금의 해랑마을이다.
3) 도깨비가 놓았나? 해랑 부부가 놓았나?
박곡리·방천리 주민들은 도깨비 징검다리로 알려진 옛 해랑교를 ‘토째비 다리’라 불렀다. 토째비는 도깨비의 이 지역 사투리. 방천리 출신 한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1970년대 이전까지 지금의 해랑교 자리에 토째비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토째비 다리는 이름과는 달리 큰 돌을 띄엄띄엄 놓은 징검다리 형태는 아니었다고 한다. 강물을 가로질러 마치 보를 쌓듯 돌을 쌓은 다음, 그 위에다 싸릿대 등을 엮고 흙을 덮은 형태로 기억했다. 그 뒤 한동안은 낮은 교각을 설치한 시멘트콘크리트 잠수교가 있다가 1998년 지금의 해랑교가 설치됐다.
주민은 해랑 어멈 전설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는 들은 기억이 없고, 근년에 와서 들은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전부터 방천리 주민들이 이 다리를 토째비 다리라고 불렀고, 강 건너 첫 번째 마을을 해랑리라 불렀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늘 주장하는 것처럼 신화나 전설은 내용의 사실여부를 떠나 이야기에 담긴 상징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지역 토박이 주민들은 어린 시절 토째비가 놓았다는 토째비 다리와 해랑마을을 기억한다. 이는 이 지역에 과거 우리나라 동해바다 여신인 해랑신과 관련 있는 어떤 사연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 무서운 동해바다 여신에서 풍요의 여신으로, 해랑신
우리나라 동해안 바닷가 마을에는 해랑신(海娘神)을 모시는 사당이 몇 곳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랑당(海娘堂)이다. 안인진리 해랑당에 얽힌 해랑 전설은 대략 이렇다.
옛날 강릉부사가 해랑이라는 관기를 데리고 해령산으로 소풍을 갔다. 그런데 그네를 타던 해랑이 그만 바다에 빠져 죽었다. 그날 이후 이 마을에는 풍랑이 일고 고기가 잡히지 않는 등 흉한 일이 일어났다. 마을주민들은 억울하게 바다에 빠져 죽은 해랑이의 한 때문이라 여겼다. 부사와 마을주민들이 해랑이의 한을 풀기 위해 해랑이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자 풍랑이 사라지고 고기가 다시 잡히기 시작했다. 이후 마을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죽은 해랑이를 위해 나무로 깎은 남근을 해랑당에 바쳤다. 그때마다 신기하게도 어선들은 만선을 하고 마을에는 좋은 일이 있었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한 마을주민에게 해랑신이 나타나 말했다. ‘나를 인근 마을 남신인 김대부신(金大夫神)과 결혼을 시켜주고, 그 뒤로는 남근을 바치지 말라’ 마을사람들은 해랑신의 말대로 해랑당에 해랑신과 김대부의 위패를 같이 설치했고, 그때부터 더 이상 남근을 바치지 않았다고 한다.
해랑 전설과 관련해 위 전설과는 조금 다른 버전의 전설도 있다. 사랑했던 남자가 바다에 빠져 죽자 해랑이도 따라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때의 한으로 해랑이는 마을사람들을 괴롭히는 원귀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마을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동해여신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어쨌든 한을 품고 마을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던 해랑이가 마을사람들의 제사를 받고부터는 풍요와 풍어의 여신이 되었다는 것이 동해안 해랑신 전설의 주요 모티브라 할 수 있다.
5) 에필로그
지난 2016년 1월 25일. 방천리 서재문화체육센터 앞 네거리에서 ‘해랑교 도깨비 징검다리 조형물 제막식’이 열렸다. 이는 ‘달성의 전설 조형물 설치사업’의 일환으로 지역에 전해오는 전설·민담·신화·유래 등을 조형물로 조성하는 사업이다. 이날 달성군에서는 해랑교에 얽힌 해랑 부부의 효행을 모티브로 한 석조물을 해랑교 남쪽 방천리 입구 도로가에 설치한 것이다.
다사라는 지명은 삼국시대 때부터 있어온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다사라는 말은 고대 신라어를 음차한 것으로 본래 의미는 ‘큰 물가’ 혹은 ‘큰 물가 언덕’이라고 한다.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우리나라 지명을 한자화할 때 다사는 하빈현(河濱縣)으로 개칭됐다. 하빈 역시 ‘큰 강가’라는 뜻이다. 금호강이 낙동강을 만나 거대한 물바다를 이루는 다사. 이 지역에 동해여신 해랑의 이름이 들어간 해랑 전설과 해랑마을 그리고 해랑교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게 참 흥미롭다. 이 지역에 전해지는 해랑 어멈 전설에는 진짜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