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오해를 했었다. 무소유의 의미를. 그리고 법정 스님의 진심을. 라디오에서 우연히 법정 스님을 소개하는 어느 정갈한 스님의 목소리에 홀려서 고가를 지불하고 법정 스님의 문고판 무소유를 구입했다. 절판된 책이어서 중고서적을 뒤져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짧은 산문으로 구성된 작은 책자에는 꾸밈없는 삶의 이야기가 단아한 문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필자가 오해하고 있었다. 막연히 무소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에 살면서 책을 출판하고 매스컴에 오르내리면서 무소유를 부르짖는 것이 모순이 아닌가? 그의 인기를 비웃곤 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니라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만 소유하는 것, 그것이 무소유 본질 이었던 것이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
이것이 법정 스님이 말한 무소유다. 무소유에 대한 스님의 이야기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스님이 고가의 난을 선물을 받아 애지중지 기르고 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추워서 벌벌 떨면서도 방의 난방 온도를 높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여행을 간다든지 볼일이 생겨도 오래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그 일상에서 스님은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무엇에 얽매인다는 것, 또 다른 구속이었던 것이다.
며칠 후 난초를 닮은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안겨주고는 비로소 얽매임에서 벗어나 날아갈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고 표현하셨다. 3년이나 정든 난을 떠나보내면서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는 홀가분함이 앞섰다고 하니 그동안 얼마나 갈등했을까.
“본질적으로 내 소유란 없다. 어떤 인연으로 해서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가버린다.”
그 후로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버리기로 마음먹은 스님은 임종에 이르러서는 관도 짜지 말고 수의도 마다하시고 승복을 입은 체 다비식만 간소하게 치러 달라고 하셨다 한다. 심지어 사리도 수습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니 법정 스님은 죽어서까지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진정 무소유의 자연으로 돌아가시길 원했나 보다.
요즈음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미니멀 라이프의 원조가 아니었을까? 어리석은 필자의 오해도 풀 겸 코로나가 잠잠해 지면 스님이 기거하신 발자취를 따라 여행을 떠나고 싶다. 순천 송광사와 인혁당 사건 이후 도피처로 삼았던 불일암과 시주를 받아서 창건했다는 서울의 길상사에 들러 무소유의 향기를 공유하고 싶다.
이윤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