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지난번에 다사읍 달천리[달래] 청주양씨 재실 묵정재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달천리 이웃 마을인 박곡리에 있는 학우재에 대해 알아보자. 박곡리는 300~400년 내력의 동래정씨 집성촌이다. 박곡[박실]마을 주산인 박산과 마을에 있는 재실 학우재에는 또 어떤 스토리가 담겨 있을까?
2) 박이 물에 떠 있는 형국, 박산
포항 가사령에서 시작된 금호강은 서쪽으로 흘러 영천·하양·경산을 지나 대구 동쪽 접경인 방촌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대구 북쪽을 동에서 서로 끝까지 흘러 달성군 강창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총길이 118㎞인 금호강은 신천과 더불어 대구의 젖줄이자 명당수다. 청계천을 서울의 내명당수, 한강을 외명당수라 하듯, 신천은 대구의 내명당수, 금호강은 외명당수에 해당한다. 금호강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달성군 다사읍 금호강 유역은 금호강 전체를 놓고 볼 때 강 유역이 가장 넓다. 지금처럼 제방이 잘 되어 있지 않았을 때는 여름철 큰물이 들면 다사읍 일대는 매번 물바다가 됐다. 그래서일까. 이 일대를 특별히 금호강 호수, 금호(琴湖)라 했다.
박산(朴山)이란 산 이름도 금호와 관련 있다. 여름철 큰물이 들면 박곡리 일대가 모두 금호강물에 잠겼는데 박곡리 뒷산인 박산은 물에 잠기지 않았다는 것. 그 모양이 마치 물에 떠 있는 박을 닮았다하여 박산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3) 동래정씨 집성촌 박곡과 학우재
다사읍 일원에는 예로부터 동래정씨 집성촌이 여럿 있었다. 다사읍 연화·박곡·세천·문양 등이다. 이들 다사읍에 세거한 동래정씨 문중은 대부분 동래정씨 동평군파 계통이다. 동평군정종(鄭種)은 동래정씨 14세로 자는 묘부, 호는 오로재(吾老齋), 시호는 양평이다. 무과출신으로 단종 때 이징옥의 난, 세조 때 이시애의 난 등을 평정한 공으로 공신에 올랐던 인물이다. 만년에 지금의 고령 덕곡 땅에 오로재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다사지역 동래정씨문중은 서로 간에 지파는 달라도 대부분 정종의 후손이다.
박곡리 동래정씨 입향조는 정종의 5세손인 이헌(伊軒) 정횡의 아들 금암 정천한으로 알려져 있다. 낙재 서사원 선생 연보에 의하면 정횡은 순찰사 류영순·판관 김헌·모당 손처눌·괴헌 곽재겸 등과 교류한 인물로 나타난다. 입향조 정천한의 아들 학우정(學友亭) 정후흥(鄭后興)은 영조 조에 무과 급제해 오위장을 지냈으며, 부인은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현손인 곽승의 딸이다.
박곡리 학우재(學友齋)는 정후흥과 그의 아들인 정시상을 기리기 위한 문중 재실로, 정후흥의 증손자인 금헌(錦軒) 정상노(鄭尙老)가 세웠다.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반 칸 퇴를 두었다. 정면에서 마주 보면 좌측에서부터 2칸 방, 1칸 대청, 1칸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의 건물은 새로 중수한 건물로 본채를 제외한 나머지 대문채·담장·뜰 등은 콘크리트로 처리했다. 고풍스런 고가의 느낌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통과 현대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4)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와 박곡
현대인들은 문중과 재실에 대해 무관심하다. 세상과 풍속이 변해 문중과 재실 일이 딴 세상 이야기가 돼버린 탓이다. 세상일은 본 바가 있는 만큼만 알 수 있다고 한다. 대부분 현대인들은 문중 재실이 무엇이고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본 적이 없다. 그러하니 문중과 재실 일에 무관심할 수밖에. 과거 전통사회에서 문중 재실은 여러 역할을 했다. 마을 회관·학교는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마을 경찰서·법원의 역할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 박곡리 학우재에서 있었던 한 일화를 통해 문중 재실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자. 아래 일화는 경향신문에 연재[2009. 1~12]된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란 글에서 필자가 일부 요약한 것이다. 참고로 고 이소선 여사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며, 연재물은 오도엽 시인이 썼다.
이소선은 1929년 겨울 달성군 성서면 감천리에서 아버지 이성조와 어머니 김분이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 나이 4살 때 아버지 이성조는 농민운동과 항일운동을 하다 일본순사들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그날 이후 3남매는 어머니와 함께 고향집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다 지금의 박곡리로 들어왔다. 이곳에서 어머니는 동래정씨 문중에 개가를 했다. 이소선은 어머니가 당신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은 새아버지에게 개가한 일로 어린 나이였지만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를 잃고 또 어머니까지 잃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박곡리는 동래정씨 집성촌이다보니 마을주민들이 모두 친척 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또래의 언니·오빠들과 어울릴 수 없었고, 언니·오빠라 부를 수도 없었다. ‘데려온 하잘 것 없는 자식’이란 딱지가 붙은 탓이었다. 참다못한 그녀는 학우재를 찾아갔다. 학우재는 정씨문중 재실로 접장이라 불리는 마을의 제일 큰 어른이 재실을 지키며 마을의 대소사를 관장했다. 이 마을에서는 학우재 접장 어른의 말이 곧 법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정씨가 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풀기위해 학우재에 매달려 있는 종을 쳤다.[키가 작아 돌멩이를 던졌다] 그녀는 접장 어른에게 소원 한 가지를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마을에서 차별 받았던 이야기와 함께 자신의 성인 이씨를 정씨로 바꿔달라고. 다음날 그녀는 학우재로 불려갔다. “성은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이 다르다고 차별한 것은 네 잘못이 아니라 정씨들의 잘못이니 사과를 하마. 앞으로는 차별하고 놀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의 어미는 이미 정씨 문중으로 출가를 했으니 너희 식구 모두가 우리 문중 사람이다” 과연 학우재 접장 어른의 말씀은 법이었다. 그날부터 그녀는 박곡마을에서 누구한테나 언니·오빠라 부를 수 있었다.
5) 에필로그
세상은 변하는 법이다. 300~400년 전의 제도와 문화가 복잡 다양해진 현대사회에 그대로 통용될 수는 없는 법.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제도와 문화를 공부하지 않고 등한시 할 수도 없다. 우리는 학교에서 과거의 역사·정치·문화·사회 등을 배웠다. 21세기를 살고 있음에도 삼국·고려·조선은 물론이요, 심지어 고조선·청동기·신석기·구석기시대의 문물에 대해서도 배웠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 우리는 소중한 그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과 100여 년 전 우리네 할아버지들께서 향유했던,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우리네 소중한 역사와 문화를 너무 쉽게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아무튼 학우재를 통해 고 이소선 여사 스토리와 옛 사람들의 고단했던 삶과 풋풋한 정서를 알 수 있어 다행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