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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33. 달래마을[달천] 청주양씨와 묵정재
  • 푸른신문
  • 등록 2020-09-10 13:5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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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같은 성씨 사람들이 오랜 세월 모여 살아온 마을을 집성촌 혹은 세거지(世居地)라 한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우리고장 달서구와 달성군에는 지금도 많은 성씨 세거지가 남아 있다. 금호강을 끼고 있는 다사지역은 과거 강 좌우로 골골마다 성씨 세거지가 있었다. 최근 이 지역에 산업단지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일부 세거지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 전통문화를 간직한 세거지가 여럿 남아 있다. 그 중 ‘달래’라는 예쁜 이름의 세거지가 있다. 현대인들에게는 달천(達川)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역민들은 아직도 달래라 부른다. 달천은 달래를 한자로 표기한 것. 이번에는 청주양씨 세거지인 달래마을에 있는 묵정재(黙庭齋)에 대해 알아보자.

2) 청주양씨(淸州楊氏)
우리나라 양씨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한자로 ‘들보 梁’을 쓰는 양씨와 ‘버들 楊’을 쓰는 양씨다. 대체로 梁씨는 제주도 삼성혈 전설에 등장하는 양을라·고을라·부을라 중 양을라 후손계통이다. 반면 楊씨는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온 성씨 혹은 고려시대 때 특정 우리나라 인물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청주양씨는 버들 楊씨다.
청주양씨 홈페이지에는 양씨의 유래를 ‘중국양씨 세계도’와 ‘청주양씨 세계도’로 분류해 소개하고 있다. 중국양씨 세계도는 전설속의 인물인 황제헌원씨를 시조로, 청주양씨 세계도는 황제헌원씨의 103세손인 양기(楊起)라는 인물을 시조로 상정하고 있다.
청주양씨 시조 양기는 본래 원나라 금자광록대부중서성 정승이었다. 고려 말 원나라 노국대장공주가 공민왕과 혼인 할 때 노빈도령의 직책으로 공주를 배종해 고려에 들어왔다. 그는 당시 고려조정의 가장 큰 어려움이었던 원에 대한 세공을 삭감하는데 공을 세워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 및 상당백에 봉해지고, 임금으로부터 청주를 성씨 본관으로 하사받음으로써 청주양씨의 시조가 됐다. 이후 벽상삼한창국공신에 오르고 청백리에도 녹선됐다. 1394년 92세를 일기로 졸했으며, 호는 암곡(巖谷),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고려-조선 초까지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 않았던 청주양씨는 조선 단종 때 평지풍파를 만나 일족이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된다. 이유는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 일가가 세조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일 때문이었다. 단종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를 잃었다. 이때 세종은 혜빈양씨를 택해 어린 손자 단종을 보살피게 했다. 혜빈양씨는 자신의 소생인 한남군 이어·수춘군 이현·영풍군 이전과 함께 단종을 잘 길렀고, 단종은 12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1455년(단종 3)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뺏기 위해 옥쇄를 거두려 할 때, 혜빈양씨는 선왕의 유훈을 들며 반대하다 죽임을 당했고, 그녀의 1남 한남군 이어, 3남 영풍군 이전도 각각 다른 이유로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당시 혜빈양씨의 유해를 몰래 수습해 포천 선영에 비밀리에 장사한 이는 수절은사(守節隱士)로 알려진 혜빈양씨의 숙부 퇴은(退隱) 양치(楊治)다. 양치는 김종서의 6진 개척 때 공을 세워 함경도·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무인으로 청주양씨 대구 입향조 양득효의 고조부다. 현재 달천을 중심으로 대구 근교에 살고 있는 청주양씨들은 대부분 양치의 직계 후손이다.

3) 청주양씨 대구 입향조, 남재 양득효
청주양씨 대구 입향조는 청주양씨 8세 남재(南齋) 양득효(楊得孝)라는 인물이다. 그는 용양위 부사과 겸 훈련원 판관을 지낸 무관이다. 선대 세거지인 경기도 포천을 떠나 달성군 하빈면 수무지에 잠시 우거했다가, 낙재 서사원의 사위가 되면서 지금의 달천에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득효는 슬하에 양홍의·양홍례·양홍지 3남을 두었다. 장남 양홍의의 후손들은 이후 저곡·칠곡에 터를 잡았다. 2남 묵헌(黙軒) 양홍례는 5남을 두었는데 이중 장남 양관은 대구 북구 국우동, 양인은 달성군 하빈면 성곡, 양치(楊緻)는 칠곡군 약목, 막내 양찬은 달성군 달천에 각각 터를 잡았다. 이처럼 양득효를 입향조로 하는 대구 청주양씨계는 청주양씨 남재공파 혹은 대구파로 불린다.
달천[달래]은 지명유래가 재미있다. 마을주민의 제보를 채록한 자료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 뒷산에 지네가 많아 지네를 없애기 위해 닭을 많이 키웠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이름이 ‘닭네’로 불리다가 나중에 달래가 되었다는 것. 또 다른 유래는 금호강과 박산이 서로 이어 달(達)해 있다고 해서 달내, 마을 한 복판에 내[川]가 흘러 고달픈 삶을 달래준다 하여 달래가 되었다는 설 등이다. 종종 이런 식의 지명유래설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기록에 근거한 하나의 정답(?)만을 내세우기 보다는, 세월 속에서 파생된 여러 설들을 수용하는 것이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1890년 재건된 묵정재
묵정재 뒤로 박산이 보인다

4) 양찬을 기리는 재실, 묵정재
묵정재는 다사읍 방천리 서재문화체육센터 쪽에서 해랑교를 건너 차로 5분정도 거리에 있다. 제일 먼저 만나는 마을이 박곡리[박실]며 두 번째 만나는 마을이 달천리다. 달천리는 박산 남쪽 끝자락에 도로변을 따라 동서로 한일자형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 중간쯤에 묵정재가 있다.
묵정재는 양득효의 2남인 양홍례의 5남 중 막내인 묵재(默齋)[혹은 묵정재] 양찬(楊纘)을 기리기 위한 재실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그는 평생토록 홀로 된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성리학 연구로 많은 후학을 양성해 지역사회에 명망이 높았다. 묵정재는 1787년(정조 9)에 처음 건립, 1890년(고종 27)에 재건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달천의 주산인 박산[218m]을 등지고 남서향으로 자리한 묵정재는 정면 5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좌우 측면에 각각 부섭지붕을 덧대어 늘인 칸수까지 치면 모두 7칸이다. 정면에서 마주보면 좌측에서부터 1칸 방, 2칸 대청, 2칸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 벽면에는 묵정재기·묵정재수리시찬조기·5개의 시판 등이 걸려 있다. 대청 상부 종도리에 ‘광서 16년 경인[庚寅·1890년] 1월 18일 오시에 기둥을 세웠다’는 상량문이 아직 남아 있다. 부속채로는 3칸 솟을대문과 근대식 관리사가 있다.

5) 에필로그
양찬을 기리는 재실 묵정재. 묵정재는 무슨 뜻일까? 이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계승하겠다는 의미다. 『논어』에 공자의 아들 백어가 집 안의 뜰을 지나다가 아버지 공자로부터 두 가지 가르침을 받는 내용이 있다. ‘시를 배워야 말을 할 수 있고, 예를 배워야 남 앞에 설 수 있다’ 여기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가정의 가르침이라는 뜻의 정훈(庭訓)이다.
묵정재 대청에 걸려 있는 「묵정재기」는 ‘무릇 어진 아비의 뜰에서 어진 아들이 나온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양찬의 아버지 양홍례의 호는 묵헌(黙軒)이다.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침묵을 지키겠다는 의미다. 양찬은 고요히 침묵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 곧 정훈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의 호가 묵정재(黙庭齋)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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