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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32.절충장군 김뉴와 낙고재[낙고정사]
  • 푸른신문
  • 등록 2020-09-03 1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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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이번에도 『현풍읍지』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현풍현읍지』(1786년), 『현풍군읍지』(1899년) 궁실조와 누정조에 등재되어 있는 누정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원호루·대양정·관수정·낙고정사 4곳이다. 원호루·대양정·관수정은 이미 본 지면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이번에는 마지막 남은 낙고정사[낙고재]에 대해 알아보자. 낙고재는 도동서원을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우측 도동리 마을 안쪽에 있다. 가장 높은 곳에 관수정이 있고 그 아래에 근래 지은 충효관과 이웃하고 있는 건물이 낙고재(洛皐齋)다.

2) 절충장군 김뉴
절충장군 김뉴[金紐·1487-?]는 서흥김씨 영남파 파조인 김중곤의 손자이자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아버지다. 그는 일찍이 충좌위 사용을 거쳐 어모장군에 제수되고, 이후 1460년(세조 6) 무과에 올라 절충장군 호군을 지냈다. 부인은 청주한씨로 중추원부사를 지내고, 사후 병조판서에 증직된 순충보조공신 청성군 한승순의 딸이다. 참고로 한훤당 선생 연보에 따르면 한훤당 선생은 1454년(단종 2) 서울 정릉동에서 태어났는데, 아마도 쌍둥이로 태어났던 모양이다. 주(註)에 ‘동유이생(同乳而生)에 먼저 남자가 1인 있었는데 길러지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선생의 동복(同腹) 형제는 무릇 12인이었는데 선생 혼자만 성장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좌에서 부터 낙고재, 부속채, 대문채
좌측 큰 건물은 충효관, 우측 작은 건물이 낙고재

3) 낙강 언덕 위, 낙고재
낙고재는『현풍현읍지』(1786년)에는 나타나지 않고 『현풍군읍지』(1899년)에 나타난다. 『현풍군읍지』에 낙고재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5세손인 사우당 김대진[1571-1644]이 창건했으며,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이 강학·휴식소로 삼았던 관수정과는 30보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낙고재의 정확한 창건연도는 알 수 없다. 다만 김대진이 세웠다는 것을 참고하면 대략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인 1600년대 초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낙고재는 김대진이 창건한 처음의 건물은 아니다. 그간의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권상규가 지은 「낙고재중건기문」을 참조하면 낙고재는 1950년 6·25한국전쟁 때 소실 됐다. 이후 1952년에 서흥김씨 문중에서 6·25한국전쟁 때 소실된 한훤당 종택 내 광제헌 복원과 함께 낙고재 복원을 추진했지만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이때 서울에 거주하던 김탁동 종원이 소식을 듣고 거금을 출연, 경남 진주에서 한옥 한 채를 매입해 1955년 늦봄에 준공했으니 지금의 낙고재다.
김대진은 낙고재 외에도 앞서 잠깐 언급한 낙고재 바로 위쪽에 자리한 정자 관수정도 세웠다. 기록에 의하면 관수정은 1624년(인조 2) 건립되었다가, 1721년(경종 1) 화재로 소실됐고, 1866년(고종 3) 다시 세워졌다. 추측컨대 낙고재 역시 관수정과 비슷한 내력을 지녔을 것 같다. 1600년대 초에 처음 세워졌다가 어느 때인가 사라졌고, 관수정처럼 1800년대 중·후반 경 다시 세워졌을 것이다. 이후 6·25한국전쟁 때 소실됐다가 다시 복원되는 과정을 거친 것 같다.
낙고재는 뜰보다 훨씬 높은 곳에 세워져 마루에 앉으면 정면으로 낙동강과 도동서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정면 5칸,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에서 바라보면 좌측 3칸은 방, 우측 2칸은 대청이다. 그런데 현재 대청에 걸려 있는 「낙고재중건기문」에는 집 구조를 가운데 마루가 있고 양쪽에 방이 있는 중당협실형으로 기술하고 있어 실제 모양과는 차이가 있다. 낙고재 아래 뜰 한쪽에는 정면 4칸 관리사와 3칸 평대문이 있다. 관리사는 제수를 장만하는 용도의 건물로 예전에는 부엌이 딸려 있었으나, 지금은 방 3칸에 대청 1칸으로 구조가 변경됐다.

4) 낙고재중건기
낙고재 대청에 걸려 있는 「낙고재중건기」는 지금의 낙고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이다. 지면 관계상 낙고재의 창건유래와 중건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 글 전반부만 한 번 살펴보자.

옛 현풍현 북쪽 낙강의 물가에 한 마을이 있는데 도동이라 하며 서흥김씨의 세장(世庄)이다. 이 마을 뒤에 산이 있는데 대조(戴鳥) 니설(尼舌)로 대니산이라 부르며 호군 김공[金公·김뉴]의 의석[衣 ·묘소]의 감춤이 있고 그 아들 문경공 한훤당 선생의 묘소도 여기에 부장( 葬)되어 있다. 그 아래 명궁[明宮·명당] 광우[廣宇·넓은 집]로 강을 경계하며 우뚝 솟은 것은 도동서원이라 하며 문경공의 제향을 올리는 서원이다. 이 서원 북쪽에 날듯이 새롭게 세운 집을 낙고재라 부르는데 곧 호군공의 묘향을 준비하는 곳으로 많은 관원 선비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경배해 왔다. 경인년[1950] 6·25 한국전쟁 때 현풍에도 병란이 할퀴고 가서 문경공 옛 집의 광제헌이 불타고 낙고재 또한 소실을 면하지 못하자 향성의 관원 선비들이 놀라지 않은 자 없었으니 하물며 자손들이야 오죽 하였으리요? 그로부터 3년 뒤 임진년[1952] 김씨의 여러 군자들이 슬픔을 딛고 분발하여 광제헌을 새롭게 복원하고 다시 슬픈 어조로 말하였다. “낙고재의 복원을 늦추지 말고 서둘러야 하나 힘이 없으니 어찌 하리요” 이 때 탁동씨는 서울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상식씨로부터 전해 듣고 정색을 하면서 말하기를 “광제헌의 중건은 참으로 여러 종원들의 정성이며 이제 정성은 남아 있어도 힘이 따르지 않아 낙고재의 공역은 내 스스로 부담하리라”하여 백만화를 연출하였다. 이에 힘입어 갑오년[1954] 가을에 착공하여 을미년[1955] 늦봄에 준공하니 그 제도는 가운데는 마루가 있고 양쪽으로 방이 있어 제관들의 숙소와 연모[燕毛·머리카락 색깔, 즉 나이에 따라 자리 하는 것]의 자리로 삼았고 낭간[廊間·부속채]을 갖춰 수직[守直·지킴] 재포[(宰脯·제수 마련)]의 장소로 삼았다. 이렇듯 완공되자 기영씨를 보내 유곡(酉谷) 권상규(權相圭)에게 기문을 청하게 하였다. 이에 상규 옷깃을 바로하며 경탄하기를 (이하생략)

5) 에필로그
2020년 여름. 도동서원 옆 도동리는 마을회관·충효관·낙고재·관수정을 남기고 대부분 집들이 철거됐다. 2년 정도 예정으로 이 일대에 조선5현 역사관·서원 스테이·문화원 등 역사와 생태를 테마로 하는 대규모 역사문화관광자원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로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도동서원과 함께 도동리는 우리나라 유교문화를 대표하는 유교문화마을로 거듭날 것으로 예상된다.
본래 도동마을은 서흥김씨 영남파 세거지였다. 서흥김씨 영남파 입향조는 세종 때 예조참의를 지낸 김중곤이다. 그는 김굉필 선생의 증조부로 현풍 솔례곽씨 문중에 장가들면서 도동리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300여 년이 흐른 1779년(정조 3), 김굉필 선생의 11세손인 김정제 때 종택을 지금의 현풍읍 못골을 옮기면서, 서흥김씨 세거지도 자연스럽게 도동리에서 못골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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