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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31. 김곽양수재(金郭兩秀才)의 정자, 대양정
  • 푸른신문
  • 등록 2020-08-27 12: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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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앞서 우리는 조선말 현풍군 관아 부속건물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원호루를 살펴보았다. 『현풍현읍지』(1786년)와 『현풍군읍지』(1899년)에 등재되어 있는 현풍군 관아건물과 누정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관아부속 누정인 원호루와 서흥김씨 문중의 관수정·낙고정사 그리고 서흥김씨와 현풍곽씨 양 문중의 대양정이 유일하다. 이번에는 한훤당 김굉필, 규헌 곽승화 두 선생의 스토리가 담겨 있는 현풍읍 용두산 대양정(戴陽亭)에 대해 알아보자.

2) 누정
누정은 누(樓)와 정자(亭子)를 함께 이르는 표현이다. 전통건축물 중 강학이나 풍류를 목적으로 지은 건축물을 일반적으로 누정이라 통칭한다. 정자는 자연을 즐기고 심신을 수양할 목적으로 세운 작은 규모의 건축물이다. 사방에 벽과 창호를 갖춘 형태도 있고, 벽 없이 사방이 툭 트인 형태도 있으며, 건물 주위에 담장을 두른 예도 있고 없는 예도 있다.
누는 정자에 비해 규모가 큰 모임이나 풍류 쪽에 좀 더 비중을 둔 건축물이다. 정자가 개인용이라면 누는 다수가 이용하는 공용건물인 셈. 누 역시 정자처럼 지대가 높고 경관이 좋은 곳에 세운다. 형태에 있어 정자와 다른 점은 기둥을 높게 세워 건물 바닥을 높인 2층 다락건물이라는 점이다. 다른 말로 누각·누옥·누관·누대·대각·층루라고도 하며, 1층 기둥사이에 문이 설치된 것은 특별히 누문이라고 한다. 대양정은 현풍·구지·유가 일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용두산 북쪽 용머리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건물의 형식은 대양정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2층 누각 형식을 갖췄다.

3) 김곽양수재(金郭兩秀才)
현풍지역에서는 예로부터 ‘김곽양수재’라는 말이 전해온다. 서흥김씨·현풍곽씨 두 문중 출신 수재 2인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두 수재라 함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과 규헌 곽승화 선생을 말한다. 김굉필 선생은 조선조 도학자의 대표요, 동방5현의 수현이요, 조선조14현의 수현이다. 또한 평생 『소학』의 가르침대로 처세했다하여 ‘소학동자’란 별칭을 얻은 인물이다. 하지만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연루돼 유배 중 다시 갑자사화에 연루, 유배지 순천에서 향년 51세로 죽음을 맞았다.
곽승화(郭承華) 선생은 김굉필 선생에 비해 전국적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지역에서는 그에 못지않은 유명 인물이다. 선생의 자는 자실이요, 호는 규헌(暌軒)으로 청백리공 곽안방의 둘째 아들이다. 1477년(성종 8)에 진사에 급제하고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 선생과 함께 공부했다. ‘김곽양수재’라는 칭호는 이때 얻은 것이다.
선생은 무오·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은 김굉필 선생과는 달리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선생의 어머니인 김해송씨의 지혜로운 대처 때문이었다. 김해송씨는 당시 사화가 곧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집에 있던 선생의 서책과 각종 문서 등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이로써 선생은 연산군 때 일어난 두 차례 사화를 피할 수 있었고, 고향인 현풍에서 처사로서 여생을 마칠 수 있었다.

현풍 용두산 대양정
대양정에서 바라본 현풍읍, 유가읍, 비슬산

4) 대니산 남쪽이라 대양정
현풍 솔례마을은 마을 북쪽 대니산을 등지고 남쪽 용두산을 마주보고 있다. 이 용두산 북쪽 끝자락에 대양정이 있다. 한문에는 ‘산남수북(山南水北)’이란 말이 있다. 산은 남쪽을 양, 물은 북쪽을 양으로 본다는 말이다. 대양정은 대니산 남쪽에 있는 정자란 의미다. 참고로 대니산(戴尼山)이란 이름은 ‘중니[仲尼·공자의 자(字)]를 머리에 이고[戴]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김굉필 선생이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대니산 유래설에는 다른 설도 여럿 있다]
『현풍현읍지』(1786년)·『현풍군읍지』(1899년)에는 대양정에 대해 ‘솔례 안산인 용두산에 있다. 한훤당 선생께서 세운 것인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술되어 있다. 실제로 대양정의 존재는 여러 기록에서 확인이 되지만, 창건 연도나 언제 무슨 연유로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2005년 지금의 모습으로 대양정을 복원할 때 세운 ‘대양정복원기념비’에, 창건연도와 사라진 연유에 대한 기록이 일부 나타난다. 기록에 의하면 대양정은 1483년 경 한훤당 선생이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되어 있다.

대양정은 조선조 성종14년경(1483년)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소축(所築)하여 진사 곽승화 선생과 학문을 탐구토론하며 훈후학(訓後學)하던 양현(兩賢)의 장구지지[杖屨之地·소요하던 곳]였으나 왜구의 용사지란[龍蛇之亂·임진왜란]으로 퇴폐되고… [대양정복원기념비문 중]

한편 대양정 누마루에는 ‘대양정 중건 전말기문’이 걸려 있는데, 대양정의 내력이 제법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약간의 주석을 곁들여 원문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화왕산·비슬산·가야산·대니산의 웅산이 존립하고, 그 지맥인 용두산에 한훤당 김 선생이 대양정을 건립하고, 점필재 김 선생의 문하생 중 양수재(兩秀才)라 일컬으신 한훤당 김 선생과 규헌 곽 선생이 지방 유생들에게 소학을 강론하고, 국상(國喪·왕실 초상)엔 향내 사림이 각구백관소의[各具白冠素衣·각자 흰 갓과 흰 옷을 갖춤]로 북향망곡우차지[北向望哭于此地·이곳에서 북쪽을 향해 곡을 함]하고, 국권 광복 시는 각자 태극기를 수지[手持·손에 들고]하고 무호만세우차지[舞呼萬歲于此地·이곳에서 춤추면서 만세를 부름]하고, 공감애락(共感哀樂)하였다. 임진병화로 정자소실(亭子燒失)한 후 선현유적을 방치우황초지간[放置于荒草之間·잡초 사이에 방치]이라. 김곽[金郭·서흥김씨, 현풍곽씨] 양문중이 선현의 유촉지를 경모수계[景慕修稧·우러러 사모하여 계를 결성]하여 수호하다가, 광복 후 향내유림이 참여하여 정자를 복원코저 백방 노력하였으니 계금(稧金)이 미액(微額)이라. 마침 박경호 군수의 각별한 배려와 최수찬 추진위원장의 노고로 오늘의 대양정이 복원된 전말을 여기에 기록하여 영원히 전하고자 한다. 을유(2005년) 오월 상한(上澣·상순) 서흥후인 김병의 근기(謹記.삼가 기록함) 포산후인 곽동후. 후학 곽영호 근서(謹書·삼가 글을 씀)

5) 에필로그
필자가 대양정을 방문한 2020년 8월 중순. 대양정 주변 배롱나무꽃은 그 절정기를 넘기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560년 전, 한훤당과 규헌 두 선생께서 마주 앉아 강론하고 풍류를 즐겼을 대양정. 필자 생각에 당시 대양정은 지금처럼 큰 누각은 아니었을 것 같다. 아마 자그마한 초가 정도 아니었을까. 지금의 대양정 전면과 후면 2층 기둥에는 2편의 시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전면에는 한훤당의 「독소학(讀小學)」, 후면에는 규헌의 7세손 곽홍장의 「대양정」 시다. 이번 더위가 지나고 나면 대양정에 올라 김곽양수재의 스토리를 한 번 반추해보면 어떨까?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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