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우리 고장 달서구와 달성군은 금호강과 낙동강을 끼고 있다. 낙동강은 남한에서 가장 긴 강이요, 금호강은 내성천에 이은 낙동강 제2지류이자 대구를 대표하는 강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강과 대구를 대표하는 강이 만나는 우리 고장은 인문지리나 자연지리적으로 볼 때 매우 특별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국제자연보호연맹에 등재된 ‘달성습지’가 있고, 대구 대표 들이라 할 수 있는 살미들·옥공들·한밭들·마갯들 등도 이 지역에 있다. 이 중 옥포읍과 논공읍에 넓게 걸쳐 있는 옥공들 한 복판에 오래된 마을이 하나 있다. 파평윤씨 400년 세거지인 신당리다. 이번에는 신당리에 있는 ‘일우재’라는 재실에 대한 이야기다.
2) 신이한 탄생설화, 용연과 파평윤씨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아주 특별난 사람들은 그 출생부터가 남달랐다. 중국의 경우 상고시대 제왕이나 위인들은 하나 같이 특별한 경험을 통해 출생했다. 북두칠성이나 용이 산모를 휘감았다거나, 알을 삼키거나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난 뒤에 잉태했다는 식이다. 우리나라도 마차가지다. 웅녀와 환웅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김알지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류의 탄생 스토리를 초자연적인 교감에 의해 출생했다하여 ‘감생제설·감천탄생설’이라 한다. 그런데 감생제설이 꼭 황제나 임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성씨 시조의 경우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오늘 이야기와 관련 있는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 탄생설이 그러하다. 참고로 윤신달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운 인물로 고려 벽상삼한익찬공신 삼중대광 태사에 오른 인물이다.
신라 진성왕 7년(893) 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어느 날 연못에 구름이 자욱하더니 천둥·번개와 함께 연못 위로 옥으로 만든 상자 하나가 떠올랐다. 고을 태수가 제단을 마련해 기도하기를 여러 날, 여전히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어느 날 동네에 사는 윤온(尹媼)이라는 이름의 한 노파가 이 옥함을 건져보니 그 안에 옥동자가 있었다. 얼굴은 용의 상이오, 양쪽 어깨에는 붉은 사마귀[日月을 상징], 좌우 겨드랑이에는 여든 한 개의 비늘이오, 발에는 일곱 개의 검은 점[북두칠성]이 있었다. 노파가 거두어 기르며 자신의 성을 붙였으니 그가 바로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이다.
3) 태위공파 신당문중 400년 세거지
세칭 삼한갑족이라 불리는 파평윤씨는 조선조에서 6명의 왕비와 그 왕비 소생의 왕 6명을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이다. 파평윤씨 16개 대파 중 옥포읍 신당문중은 ‘태위공파→시랑공파’에 해당한다. 태위공파는 12세 빈재(斌齋) 윤안비(尹安庇)를 파조로 하는 분파다. 윤안비는 안향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 문하시랑·찬성사·좌대언·태위 등의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윤안비의 손자인 14세 윤인달이 북병사를 지냈는데, 이때 임지인 함경도 북청으로 이거했다. 15세 윤비(尹備)는 이부시랑·한성판윤을 지냈는데, 그가 바로 시랑공파 파조다. 16세 윤종창 때 북청을 떠나 대구 화원읍 구라리로 이거했으며, 22세 가선대부 윤복, 홍문관직제학 윤적 형제 때 지금의 옥포 신당에 처음 터를 잡았으니, 이들이 400년 내력의 파평윤씨 신당 입향조다. 참고로 이들 입향조 형제의 아버지인 21세 윤범은 무과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일어나 화왕산전투에서 순국해 병조정랑에 추증된 인물이다.
신당리(新塘里)라는 지명은 예전 이곳에 지당(池塘), 즉 못이 있은 것에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풍수적으로 볼 때 신당리 마을 형국이 붕어를 닮았는데, 붕어는 물이 있어야 살 수 있다하여 못을 만들었다는 것. 현재 못은 사라지고 없다. 또 일설에는 마을에 서낭당이 있어 신당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우리 고장 최대 쌀 생산지인 이곳 신당리 일원 옥공들은 지금은 농사에 최적화된 곳이지만, 과거에는 여타 강변마을처럼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들이었다. 하지만 낙동강 상류에 안동댐·임하댐 등이 건설되고, 제방이 잘 쌓아짐에 따라 지금은 침수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옥토가 되었다. 이 들판 한 가운데 신당리가 있다.
4) 윤복·윤적 형제의 호에서 유래, 일우재
파평윤씨 신당문중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일우재(逸友齋). 이 재실은 성격상 강학형 재실이 아닌 제향형 재실이다. 일반적으로 재실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강학형 재실과 제사를 목적으로 하는 제향형 재실이다. 강학형 재실은 정사·서사 등으로 불리고, 제향형 재실은 재실·재사 등으로 불린다. 하지만 둘 다 특정 인물을 추모하고 기리는 목적에서 세워졌다는 점은 동일하다.
일우재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17년 처음 건립됐다. 당시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5칸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었다. 1924년 일우재 뒤뜰에다 시랑공파 파조인 윤비 이하 선조 7위를 기리는 비 1기 세웠으며, 1962년 선조 7위에 대해 각각 비와 제단을 추가로 설치했다. 2004년 옛 일우재를 헐고 지금의 일우재를 건립했다. 이때 태위공파 파시조인 윤안비[12세]·윤침[13세]·윤인달[14세]의 비를 추가로 조성하고, 12세에서 21세까지 10위 선조 제단임을 알리는 ‘파평윤씨추원단비’도 함께 조성했다. 향사는 매년 한식날 봉행하고 있다.
일우헌이란 재실명은 파평윤씨 시랑공파 신당 입향조인 윤복·윤적 형제의 호에 유래한 것. 윤복의 호 금락일수[琴洛逸叟·강가의 늙은이]에서 ‘일’자를, 윤적의 호 이우헌(二友軒)에서 ‘우’자를 취한 것이다. 일우재 뒤뜰에 조성된 10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세 태위공 윤안비, 13세 영평군 윤침, 14세 상시공 윤인달, 15세 시랑공 윤비, 16세 첨사공 윤종창, 17세 사정공 윤덕흥, 18세 참의공 윤태동, 19세 사정공 윤인수, 20세 호군공 윤황, 21세 정랑공 윤범’
5) 에필로그
신당리 가는 길에 보호림으로 지정된 교항리 이팝나무 숲이 있다. 이팝나무 등 수령 200-300년 노거수 80여 그루에 1990년대 심은 수백 그루 이팝나무가 숲을 이룬 곳이다. 5월 초·중순이면 만개한 이팝나무 꽃으로 숲은 장관을 이룬다. 이 마을에는 이팝나무 꽃이 만개한 해는 풍년이 들고, 꽃이 시원찮은 해는 흉년이 든다는 구전이 전해져온다. 그래서일까. 예로부터 숲에 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불이익을 주었고, 아무리 땔감이 없어도 이팝나무만큼은 베지 않았다고 한다. 신당리 일우재와 함께 여인들의 꽃놀이 장소요, 남자들의 풍류 장소요, 아이들의 단골 소풍지였던 교항리 이팝나무 숲도 꼭 한 번 둘러볼만 한 우리고장의 소중한 문화유적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