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100여 년 전 창건된 신라 천년고찰
지난주에 이어 용연사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보자. 먼저 용연사의 창건유래에 대해 알아보자. 용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로 신라 천년고찰이다. 용연사에는 현재 두 가지 사적기가 전한다. 하나는 1722년(경종 2)에 조성된 ‘용연사중수비문’으로 임수간이라는 인물이 지은 것이며, 다른 하나는 1748년(영조 24)에 금곡선청이 쓴 「용연사사적기」다. 두 기록에서는 용연사를 신라시대 인물인 관기와 도성에 기원을 두고, 여말선초 인물인 보양선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되어 있다. 관기와 도성은 『삼국유사』에 ‘포산이성’[비슬산의 두 성인]으로 소개된 인물이고, 보양선사는 왕건을 도와 고려창업에 기여한 인물이다.
용연사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절의 창건연도는 지금으로부터 1,108년 전인 912년 신라 신덕왕 1년이다. 이후 고려시대 때의 역사는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3년(선조 36) 사명대사의 명으로 인잠·탄옥·경천 등이 재건했다. 1650년(효종 1) 화재로 적멸보궁 누문인 보광루만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계환·여휘 등이 중건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와 같은 대사찰의 모습을 갖췄다.
2) ‘일곱 용’ 전설이 깃들다
용연사란 절 이름은 본래 이 터에 용이 살았다 해서 붙은 이름인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하나 전한다.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용연사 아래에 용연지라는 못이 있다. 주민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용연지에 의존해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어느 날 외적의 침입이 있었다. 이때 마을청년 일곱 명이 나서 외적을 물리쳤지만 일곱 청년은 모두 죽고, 용연지는 청년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용연지 물이 마르기 시작하더니 결국 바닥을 드러냈다. 이를 죽은 청년들의 한 때문이라 생각한 주민들이 몇 해에 걸쳐 용연지에서 큰 제사를 지내자 다시 못에 물이 가득 찼다. 그때부터 용연지에는 일곱 마리 어린용이 살기 시작했고, 이 용들은 천재지변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됐다. 세월이 흘러 어린용이 승천할 때가 됐다. 그런데 일곱 마리 용이 서로 먼저 승천하려고 다투다 결국 네 마리만 승천하고 세 마리는 못에 남게 되었다. 용연지에 남은 세 마리 용은 더 이상 마을 수호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승천을 두고 서로 다투기만 했다. 그래서일까. 마을에 흉년과 돌림병이 돌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해결책으로 먼 바다로 나가 용왕에게 기도를 했다. 용왕은 아들인 이무기를 용연지로 보내 남은 세 마리 용을 죽이도록 했다. 결국 남은 세 마리 용은 죽었고 마을의 천재지변은 사라졌다. 그 후 주민들은 죽은 세 마리 용을 위해 매년 제사를 지냈고, 용을 위해 절을 지었으니 ‘용 못’이란 뜻의 용연사였다. 지금도 용연사에서는 매년 단오에 용왕재를 크게 지내고 있다.
3) 용연사 둘러보기
여느 사찰처럼 용연사도 일주문에서부터 시작된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화려한 단청이 칠해진 다포양식의 일주문에는 ‘비슬산용연사자운문’이라 편액 되어 있다. 두 개의 기둥 위에 가분수마냥 거대한 기와지붕을 이고 있는 일주문. 이 일주문에는 우리가 평소 인식하지 못했던 특별한 비밀 하나가 있다. 기둥 아래쪽이 땅에 박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초석 위에 그냥 덩그러니 올려져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기둥뿌리를 땅에 묻고 콘크리트 등으로 굳힌 것도 아닌데, 일주문은 넘어지지 않고 잘 서 있다. 서양건축가들은 오랜 세월 지진이나 태풍에도 끄떡없는 우리나라 사찰 일주문을 보고 다들 신기해한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부산 범어사 일주문이다.
용연사 경내는 극락전·명부전·적멸보궁 세 영역으로 나눠진다. 일주문을 지나 만나는 좌우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극락전·명부전 영역, 왼쪽으로 가면 적멸보궁 영역이다. 먼저 극락전·명부전 영역을 살펴보자.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극락교를 건너면 천왕문이 있다. 내부에는 사천왕상이 아닌 사천왕 그림이 그려져 있다. 천왕문을 지나 안양루 아래를 통과해 몇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부처님의 세계인 도리천이 펼쳐진다.
일반적으로 사찰에는 3개의 문이 있다. 처음 만나는 문이 일주문이다. 일주문은 사찰영역의 표시임과 동시에 승과 속의 경계라는 상징을 담고 있다. 두 번째 만나는 문은 천왕문·금강문이다. 불법을 수호하는 수문장이 경계를 서고 있는 초소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만나는 문은 해탈문·불이문이다. 부처님이 계신 불법의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출입문이다.
용연사 해탈문인 안양루를 통과하면 정면으로 주법당인 극락전과 함께 3층 석탑·영산전·삼성각·심검당·선열당 등의 전각이 펼쳐진다. 좌측으로 보장각을 지나 청운교를 건너면 명부전과 사명당이 있다. 사명당은 지금의 용연사 적멸보궁을 있게 한 사명대사를 기리는 건물이다.
이번에는 적멸보궁 영역을 살펴보자. 처음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비슬산용연사적멸보궁’이라 편액된 일각문을 지나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멀리 석축 사이로 ‘금강계단’ 편액을 달고 있는 2층 누문이 있다. 해탈문에 해당하는 보광루다. 안양루처럼 보광루 아래를 통과하면 정면에 적멸보궁, 좌측에 향로전이 있고, 적멸보궁 뒤편에 석가여래사리탑과 금강계단이 있다.
4) 극락전 후불탱화와 복장유물
용연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1813호]은 17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조각승 도우의 작품이다. 불상 내부에서 나온 복장유물인 후령통 3점, 조성 발원문 8점, 묘법연화경 등도 불상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현재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미타여래삼존좌상 뒤에는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다. 그런데 1731년(영조 7) 조성된 이 탱화는 시주자가 좀 특별하다. 시주자 빈궁 조씨는 영조의 장남으로 7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0세에 사망한 효장세자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탱화는 1744년 조성된 삼장탱화와 함께 도난을 당해 현재는 복사본을 대신 걸어 두었다.
5) 에필로그
용연사 금강계단은 통도사 금강계단·금산사 방등계단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 계단형 석가여래사리탑이다. 용연사 금강계단은 규모라는 측면에서는 통도사 금강계단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통도사와 용연사의 진신사리는 한 사리함에서 나온 2과의 진신사리를 각각 1과씩 나눠 봉안한 것이다. 적멸보궁의 의의는 부처님 진신사리에 있는 것이지 봉안시설의 규모에 있는 것은 아닐 터. 우리 고장 비슬산 용연사 적멸보궁이 영험 있는 기도도량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