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우리고장인 달서구 상인동은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공존하는 매우 특별한 공간이다.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단지 사이로 월곡역사공원·낙동서원·장지산·월곡정사·단양우씨 판서공파 종택·월평재·첨모재·인산정사 등 많은 유적이 있어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다. 과거 상인동에는 월촌·도평·채정·달배 등의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이중 월촌이 제일 큰 마을이었다. 이번에는 월촌에 자리한 ‘인산정사’에 대해 알아보자.
2) 퇴계를 경모하다, 경도재 우성규
한말 월촌 출신으로 대구 선비 그룹의 리더였던 우성규[禹成圭·1830-1905]. 행장에 기록된 선생의 삶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선생은 단양우씨 시조인 고려 향공진사 우현의 12세손으로 자는 성석, 호는 경도재다. 아버지 우진권과 어머니 달성하씨의 4남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노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했다. 공부할 때는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었고, 글자를 쓸 때는 절대 날려 쓰는 법이 없었다. 1865년 선생 나이 36세 때, 서원철폐령의 출발이 된 만동묘 훼철사건이 일어나자 비분강개하여 고향 월촌으로 낙향했다. 49세에 비로소 처음 관직에 나아가 선공감역·감조관을 지냈다. 55세에 상의원 주부로 있을 때 충·신·덕이 두텁다하여 대왕대비로부터 관복을 하사받았다. 56세에 현풍현감으로 부임해 ‘소학동자’ 김굉필 선생의 유풍을 진작코자 매월 초하루에 선비들을 모아 소학을 강학했다. 57세에 영덕현령을 거쳐 예안현감을 지냈는데, 검소한 생활과 학문을 일으킨 공으로 고을민의 칭송이 자자했다. 58세에 임천군수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같은 해 단양군수에 부임했다. 59세에 영월부사로 부임해 사슴을 진상하는데 따른 폐단을 바로 잡았으며, 녹봉을 털어 사육신과 생육신을 제향하는 창절사를 중수했다. 60세에 칠곡부사로 녹봉서원와 사양서원의 유풍을 일으켰으며, 62세에 관찰사 이헌영과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향음례를 행했다. 63세에 돈녕부 도정[정3품 당상관]에 올랐으나 「속귀거래사」를 짓고 낙향, 월촌에서 여생을 보내고 향년 76세로 졸했다.
선생의 마지막 모습 역시 행장에 잘 묘사돼 있는데,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75세 갑진년[1904] 8월, 건강이 나빠졌으나 이부자리 위에서도 서책을 놓지 않았다. 임종 하루 전날 인당 현판기를 쓰다가 병세가 심해졌다. 선생이 사람들을 불러 서책을 점검케 했는데 빌려온 책은 되돌려 보내고, 빌려 준 책은 되찾아 오게 했다. “절대 시끄러운 세상사에 뜻을 빼앗기지 말고 분수를 지켜 처신하여 선대의 업을 떨어뜨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졸했으니 1905년 정월 초3일이다.
옛 선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字)와 호(號)가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이름 대신 쓰이는 일종의 별칭·별명이었다. 그런데 자와 호에는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자는 타인이 지어주고 호는 자신이 짓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호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호를 짓는 방법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자신이 닮고 싶은 훌륭한 인물을 상징하는 글자를 호에 사용하는 것이다.
고려 말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보급한 인물인 안향의 호는 회헌(晦軒)이다. 이는 성리학 창시자인 주자를 경모하여 주자의 호 회암(晦庵)에서 ‘회’자를 가져온 것. 이처럼 우성규 역시 퇴계 선생을 경모하여 자신의 호를 경도(景陶)라 했다. ‘도’자는 퇴계 선생을 상징하는 글자다.
3) 우성규의 생전 강학소, 인산정사
63세로 관직생활을 정리하고 낙향한 우성규. 선생이 고향 월촌으로 귀향하자 수많은 선비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선생 문하에 몰려들었다. 이때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사림이 나서 옛 덕동서원 터에 강학소를 건립했으니 ‘인산정사(仁山精舍)’다.
현재 인산정사 경내에는 두 채의 건물이 있다. 정면에 자리한 새 인산정사와 그 앞쪽에 자리한 옛 인산정사다. 본래 새 인산정사 자리에 옛 인산정사가 있었는데, 2001년 옛 인산정사를 앞쪽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지금의 새 인산정사를 건립했다.
새 인산정사는 정면 5칸, 측면 1.5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과 측면 반 칸 퇴에는 난간을 설치했다. 가운데 3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씩은 방인데, 동쪽 방은 경한재, 서쪽 방은 경직재다. 대청에는 ‘경도재기’, ‘경도재상량문’, ‘인산정사 중건기’, 시판 등이 걸려 있다. 옛 인산정사는 정면 4칸, 측면 1.5칸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인산정사 앞뜰에는 ‘경도재우성규선생기적비’가 있고, 뒤뜰에는 ‘덕동서원유지비’와 ‘능주구씨부인행덕비’가 있다.
4) 재실·재사·서사·정사
문중과 관련 있는 옛 건축물을 흔히 ‘재실’이라 통칭한다. 재실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제사용’ 재실과 ‘강학용’ 재실이다. 제사용 재실은 제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주로 묘소 인근에 있다. 제관들의 숙식이나 재계, 제수 준비 및 진설, 우천 등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 묘소에 가지 않고 묘소를 바라보며 제사 지내는 망제(望祭)를 위한 공간 등으로 사용된다. 이에 반해 강학용 재실은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재실이다. 특정인물이 살아생전 강학소로 사용했거나, 아니면 문중원 교육을 목적으로 한 건물이다. 전자의 경우 재실·재사, 후자의 경우 서사·정사 등으로 구분하여 칭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 둘의 공통점은 문중을 빛낸 특정인물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한 건축물이라는 점이다.
우성규 선생은 만년에 고향에서 서찬규·이종기·최익현·송병선 같은 한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큰 선비들과 활발하게 교유했다. 선생이 대구에서 이들과 함께 교유하고 강학한 곳으로는 열락당·상화대·귀암재·백석탄·유호재·태고정·낙동정사·동계서당·인산정사 등이 대표적이다.
5) 에필로그
우성규 선생 행장에 형 애일공과의 일화가 일부 기록되어 있다. 소싯적에 형이 호미를 들고 밭을 매자 선생이 함께 일하기를 청했다. 그때 형이 만류하며 말하기를 ‘집은 가난하고 부모님은 늙었다. 집안일은 내가 힘쓸 터이니 너는 부지런히 공부해 집안을 일으키고 부모님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라’고 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공부 외에는 아무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형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을까. 선생은 관례[남자가 20세 때 치르는 전통통과의례] 때 형으로부터 받은 목갑거울을 30여 년 간 잘 사용한 후 큰 조카에게 다시 되돌려주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