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한 독자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 구례마을 예연서원 입구에 있는 곽준·곽재우 신도비를 소개해 달라는 것. 두 곽 선생 신도비는 2018년 8월 본 지면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예연서원을 소개할 때 잠시 언급한 적이 있다.[‘임란 영웅 곽재우와 곽준 그리고 예연서원’(2018. 8. 2, 2018. 8. 9)] 필자의 글에 관심을 보여준 애독자의 요청인 만큼 이번에는 두 곽 선생 신도비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2) 신도비와 묘비는 다르다
이번 연재를 위해 인터넷에서 자료검색을 하다 곽재우 신도비 관련해 몇 몇 오류를 발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곽재우 신도비명[비문]을 허목 선생이 지었다는 내용이다. 현풍곽씨 문중이나 지역향토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곽재우 신도비명은 대제학 권유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런 내용이 생산되고 전파된 것일까? 의문을 가지고 인터넷에 올라 있는 여러 글을 살펴보니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전통문화에 대한 지식 오류, 또 하나는 원천자료의 오류였다.
전통문화에 대한 지식 오류란 ‘신도비·묘비·지석’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말한다. 이 셋은 묘소와 관련 있는 비라는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물건이다. 신도비는 글자 그대로 신도(神道), 신령이 다니는 길에 세운 비다. 무덤 앞에 세우는 묘비와는 별개로 묘소에서 좀 떨어진 곳에 세우는데, 아무나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국법에 따라 임금이나 2품 이상 관직을 지낸 인물에 대해서만 거북받침과 용머리를 갖춘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다. 반면 무덤 앞에 세우는 묘비[묘표(墓表)]는 아무나 세울 수 있었다. 형태 역시 자유로워 용머리를 올릴 수도 있고, 거북받침을 둘 수도 있었다. 묘비와 비슷한 것으로 ‘묘갈(墓碣)’이 있다. 묘갈은 비석의 윗부분을 반원형으로 둥글게 다듬은 것을 말하고, 묘비는 윗부분을 직선으로 처리하거나, 연꽃·용머리·기와지붕 형태로 조성한 비를 말한다. ‘비갈’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이는 묘갈과 묘비를 합쳐 부르는 표현이다.
비[비갈]에는 글이 새겨져 있다. 묘갈에 새긴 글은 묘갈문, 묘비에 새긴 글은 묘비문이라 한다. 통상 비문은 ‘표제·서·명·추기’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표제’는 제목에 해당하는 것으로 비 몸돌 최상단에 가로로 글자를 새긴 부분이다. 대부분 전서체로 새긴 까닭에 ‘전액’이라고도 한다. ‘서’는 비문의 본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물의 성명·세계·생졸·성장·이력·언행·공적·자손 등이 산문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명(銘)’은 서 다음에 나타나는 운문으로 일종의 추모시다. 비문이 산문으로만 끝이 나면 묘갈문·묘비문, 운문이 포함되면 묘갈명·묘비명이라 한다. 추기는 추가로 덧붙인 부분이다.
3) 땅 속에 묻힌 또 하나의 비, 지석
지상에 세우는 신도비·묘비와는 달리 무덤 앞 땅 속에다 묻는 비도 있다. 이를 ‘지석(誌石)’·‘묘지석’이라고 한다. 지석은 돌 혹은 도자기로 만든 작은 크기의 사각형·원형 판 표면에다 글자를 기록한 것이다. 죽은 이의 성명·생졸·행적·무덤의 좌향 등 산문만 기록된 것을 묘지문, 운문인 추모시가 더해진 것을 ‘묘지명(墓誌銘)’이라 한다. 이처럼 지하에다 지석을 묻는 것은 무덤에 변고가 있더라도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끔 하려는 것이다.
곽재우 신도비명 저자 관련한 오류의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이 ‘묘지명’에 있다. 허목 선생 문집인 『기언』과 곽재우 장군 문집인 『망우당선생문집』에 ‘신도비명’과 ‘묘지명’ 저자에 대해 각기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망우당선생문집』에는 신도비명은 대제학 권유, 묘지명은 허목이 저자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언』에는 ‘망우당곽공신도비명’의 저자가 허목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망우당 문집에는 허목이 ‘묘지명’을 지었다고 되어 있고, 미수 문집에는 허목이 ‘신도비명’을 지었다고 서로 상이한 내용이 등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문집이라는 원천자료상의 차이에 대해 필자가 뭐라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다만 조심스럽게 필자의 사견을 밝힌다면 이렇다. 『망우당선생문집』의 기록처럼 신도비명은 권유, 묘지명은 허목의 글인 것 같다. 구례마을에 있는 곽재우 신도비명을 보면 『망우당선생문집』의 권유 신도비명과 문장이 일치하고, 실제 신도비에도 ‘대제학 권유 찬[撰·지음]’이라 새겨져 있다. 반면 『기언』에 수록된 허목의 신도비명은 『망우당선생문집』에 수록된 허목의 묘지명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4) 곽준·곽재우 신도비(각)
구례마을 초입에 자리한 곽준·곽재우 신도비(각)은 규모부터 남다르다. 임란 영웅으로 알려진 두 인물의 거대한 신도비가 한 비각 안에 같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좌측이 곽준, 우측이 곽재우 신도비다. 비 받침돌과 비 머릿돌을 뺀 비 몸돌만을 놓고 봐도 곽준 신도비는 높이가 258cm, 곽재우 신도비는 265cm로 현존하는 대구지역 신도비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다. 곽준 신도비는 우복 정경세 선생이 짓고, 동명 김세렴이 쓰고, 전액은 대제학 김광현이 썼다. 곽재우 신도비는 대제학 권유가 짓고, 미수 허목 선생의 글자를 집자했으며, 전액은 미수 선생이 직접 썼다.
두 신도비는 처음부터 이곳에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곽준 신도비는 1634년(인조 12) 지금의 현풍 솔례마을에 처음 세워졌다가, 1751년(영조 27) 유가 구례마을에 곽재우 신도비가 세워질 때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신도비는 6·25전쟁 때 비각과 함께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1957년 비와 비각을 다시 중수했으며, 2010년 처음의 자리에서 서쪽으로 6.3m 옮겨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중창했다.[옛 비는 처음 자리에 묻었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두 신도비에는 영험함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밀양 표충사비처럼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이적을 보였다는 것. 한일강제병합, 2차 세계대전, 6·25전쟁은 물론, 1957년 새로 복원한 지금의 비 역시 4·19, 5·16 때 땀을 흘렸다고 한다. 최근에는 2006년 2월 14일 땀을 흘려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5) 에필로그
유가읍 가태리 구례마을에는 곽준·곽재우 신도비 외에도 이들을 제향한 예연서원이 있다. 서원 바로 아래에는 곽재우 장군의 불천위사당과 재실인 경충재, 그리고 종택도 있다. 또한 가태리 초입 산기슭 대숲에는 곽 장군의 아버지인 정암 곽월을 제향한 남계서원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허물어졌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