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며칠 전 평소 알고지내는 향토사학자 한 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내용인즉슨 대구 모 일간지에 월배 달비골 송석헌[첨운재]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는 것. 사실 이 정자는 2년 전쯤 해당 일간지 정인렬 논설위원과 이정웅 향토사학자와 함께 다녀온 적이 있고, 이후 금석문전문가인 전일주 선생과도 다녀온 적이 있는 곳이다. 최근 들어 이곳이 세상에 좀 알려진 모양이다. 언론에도 소개가 되고 안내판까지 세워졌으니 말이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고 이 분위기를 타고 필자도 몇 자 덧붙여본다.
2) 대부호 독립지사 향산 윤상태
달비골에 송석헌(松石軒)을 건립한 향산(香山) 윤상태[尹相泰·1882-1942]. 선생은 일제강점기 대구의 3천석 대부호로 독립운동에 앞장 서 1991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인물이다. 젊은 시절 부친의 임지였던 고령 성산을 떠나 월배 상인동에 정착하면서 우리고장과 인연을 맺었다.[상인동 출생설, 김해 출생설도 있다]
1905년 1월, 선생은 24세의 젊은 나이로 거제군수가 됐다. 하지만 그 해 11월,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군수직을 사임하고 낙향했다. 일제에 의한 한일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선생은 일찌감치 고령 우곡에 일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을 시작했다. 1915년에는 박상진·서상일·이시영·박영모·홍주일 등과 함께 대구 앞산 안일암[안일사]에서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결성, 최고책임자인 ‘통령’에 선임됐다.
선생은 서상일의 태궁상점·윤한병의 향산상회·안희제의 백산상회 등의 경영에도 참여했다. 1917년에는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여 경남 일원 만세시위를 주도했으며,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부터는 독립자금 모금에 전력했다. 또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유림단체에서 작성한 ‘파리장서’를 번역하고 전달하는 과정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고향인 상인동에 덕산학교·회보당을 세워 교육을 통한 항일운동을 지속했으며, 1932년에는 교남학교[현 대륜고] 설립에도 참여했다. 1942년 선생은 또 다시 일경에 체포, 고문 후유증으로 그 해 향년 61세로 졸했다. 선생의 손녀인 윤이조 여사는 자서전 ≪지나간 것은, 다 그립고 눈물겹다≫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 다음해인 1942년,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 어느 날 할아버지가 안보이셨다. 아무도 할아버지가 어디 가셨는지 말해주지 않았고 어른들의 표정이 무거웠다. 우리도 덩달아 조심스러워졌다. (중략) 밖에서 청지기 아저씨가 할아버지를 업고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업힌 할아버지는 온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께서 무진회사를 거점삼아 독립자금을 상해로 보낸 것을 조선인 형사 앞잡이가 고발을 해서 일경에 잡혀가셔서 모진 고문을 당하시고 그 고발자에게 무진회사를 넘겨주기로 하고 풀려나신 것이라 했다. 그 후로 우리는 무진회사에 가지 않았다. 그 고발자는 그렇게 해서 잘 살았는지 모를 일이다.
3) 명(名)·자(字)·호(號)
옛날 우리네 선비들은 ‘명·자·호’ 세 종류의 호칭을 사용했다. ‘명’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진짜 이름이다. 하지만 선비들은 명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명 대신 ‘자’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자는 요즘의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계례 때 빈[賓·큰 어른]이 지어주는 이름이고, ‘호’는 스스로 짓는 이름이다. 선비들은 평생을 살면서 ‘명’ 대신 ‘자’나 ‘호’를 주로 사용했다. ‘명’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부모님이 지어준 명은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을 피하고자 한 까닭이다. 이처럼 족보에만 올려두고 사용하지 않은 명이지만 반드시 사용해야하는 때가 있었다. 바로 임금님과 부모님 앞에서였다.
옛 선비들은 서로 만난 적이 없어도 호만 알면 상대를 거의 정확하게 판단했다. 호는 스스로 짓는 것이기에 호 주인의 철학과 삶의 지향점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 건물에도 호가 있다. 당(堂)에 붙인 당호, 헌(軒)에 붙인 헌호, 재(齋)에 붙인 재호, 집[宅]에 붙인 택호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당호·헌호 등도 마찬가지다. 그 집 당호를 보면 그 집 주인의 인물됨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호가 그 집 주인의 호로 사용되는 예가 많은 것도 다 이러한 까닭이다.
4) 자연에 거하다, 송석헌[첨운재]
달비골 초입에 자리한 임휴사에서 달비골 방향으로 400m쯤 산책로를 따라 더 들어가면 우측 식당 아래에 송석헌이 있다. 이 집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20년, 윤상태 선생이 건립한 것으로 정자·별서 성격의 건물이다. 선생은 당시 상인동에 덕산학교·회보당을 설립, 교육활동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전력했다. 그때 이들 학교와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 정자 한 채를 마련하고 송석헌[첨운재]이라 이름 했다. 이 집은 선생의 정자이기도 하지만, 시회(詩會)를 가장한 비밀독립운동 모임장소이기도 했다. ‘송석헌[소나무와 바위가 있는 집]’과 ‘첨운재[구름을 바라보는 집]’는 모두 자연에 은거한다는 의미다. ‘문득 와서는 산천의 주인이 되었으니, 티끌 진 세상의 성함과 쇠함에는 전혀 관계 않으리’로 끝나는 선생의 ‘송석헌 원운시’에도 자연에 은거하고자하는 선생의 바람이 잘 나타나 있다.
5) 에필로그
앞서 언급한 선생의 손녀 윤이조 여사 자서전에는 여사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송석헌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송석헌 인근에 물레방아가 있었고, 큰 바위 옆 사립문 안쪽에 연못이 딸린 송석헌이 있었다. 정자에는 ‘세심정(洗心亭)’, 마루에는 ‘송석헌·첨운재’ 현판이 걸려 있었고, 마당에는 큰 배롱나무 두 그루와 자두나무가 있어 자두를 많이 따먹었다고 한다. 동쪽 툇마루 옆에는 집채만 한 큰 바위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었으며, 복숭나무가 많았던 정자 아래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흘러 멱도 감고 다슬기를 줍기도 했다. 가끔 할아버지 친구 분들이 오셔서 시회를 여셨는데 그 시회가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모임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묘사의 상당부분이 지금의 송석헌 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 단, 정자 바로 앞으로 앞산터널 대로가 뚫렸다는 점만 빼면…. 독립지사 향산 윤상태 선생의 손길이 남아 있는 송석헌[첨모재]이 이제라도 세상에 알려졌으니 참 다행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