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구마고속도로 현풍방면 현풍휴게소 서편 언덕에 명물이 하나 있다.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500년 할아버지 느티나무’다. 나뭇잎이 없는 계절. 느티나무 인근에 조성된 전망대에 서서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북서쪽 언덕 아래를 잘 살펴보면 큰 비석과 함께 고가 한 채가 보인다. 걸어서 채 1분도 안 되는 거리다. 낙동강가 절벽 위에 자리한 이 고가는 공신정이란 이름의 영월엄씨 문중 정자이자 재실이다. 이곳에는 또 어떤 스토리가 숨어 있을까?
2) 성하2리 웃물문 마을
대구에서 창녕
으로 가는 국도 5호선. 논공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좌측으로 현풍읍내, 우측으로 성하리가 나온다. 성하리(城下里)는 산성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뜻. 성하리 산성은 이름이 여럿이다. 읍내 서쪽에 있는 산성이란 뜻의 서산성, 수문진(水門津)에 있는 산성이라해서 수문진산성, 수문진산성의 순 우리말인 물문산성, 반달을 닮았다하여 반월성 등등. 나루이자 자연마을 이름이기도 한 성하리 물문나루[수문진]는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인 통일신라말기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물문나루는 과거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던 시절, 현풍의 관문이자 강 건너 고령 개진면 부리로 연결되는 현풍의 대표 나루터였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낙동강변을 따라 마을 가장 남쪽에 수문진산성이 있고, 산성 북동쪽에 아랫물문[성하1리], 그 북쪽에 웃물문[성하2리] 마을이 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공신정은 웃물문마을 북쪽 끝단 낙동강변에 있다.
3) 영월엄씨 달성 입향조 엄계
영월엄씨는 ‘현풍곽씨·서흥김씨’ 등과 함께 조선시대 현풍지역을 대표하는 성씨 중 하나였다. 영월엄씨가 달성 땅에 처음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엄계[嚴誡·1456-1506]라는 인물로부터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에 오른 가선대부 좌군도총제부 동지총제를 지낸 엄유온, 할아버지는 성균진사 엄극인, 아버지는 사직을 지낸 엄산수다. 형제로는 형 두 명과 누이 두 명이 있었는데 누이 중 한 명이 성종의 후궁인 귀인 엄씨다. 귀인 엄씨는 귀인 정씨와 함께 갑자사화 때 연산군에 의해 참혹한 죽임을 당한 비운의 여인.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폐출된 일에 두 귀인이 관련됐다고 의심을 품은 탓이다. 이 일로 엄계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아버지 엄산수와 큰 형인 엄훈은 경기도 이천으로, 둘째 형 엄회는 양천으로 유배를 갔고, 엄계는 처음에는 연산군에 의해 참형을 당할 뻔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현풍현에 유배됐다. 그는 유배생활을 하면서 지금의 공신정 자리에 작은 초막을 짓고, 초막 뒤편에 단을 하나 쌓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매일 인시[새벽 3~5시]에 단에 올라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가 북쪽을 향해 절을 한 이유는 아무리 연산군이 미워도 언젠가는 바른 임금의 자리로 돌아오길 바라는 우국충정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자신의 초막에 붙인 ‘공신(拱辰)’이라는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다.
4) 공신정? 공진정?
자왈(子曰) 위정이덕(爲政以德)이 비여북신(譬如北辰)이 거기소(居其所)어든 이중성(而衆星)이 공지(共之)니라.[共=拱]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으로 정사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면 모든 별이 그에게로 향하는 것과 같다”)
《논어》〈위정〉편 첫 문장이다. 무수히 많은 하늘의 별이 붙박이 별인 북극성을 중심으로 천체운동을 하듯, 위정자 역시 덕으로써 정사를 돌보면 모든 신하들이 위정자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따른다는 뜻이다. 유배지에 공신정과 단을 짓고 매일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던 엄계. 그는 폭군 연산군을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않았다. 도리어 저 하늘의 주인인 북극성처럼 하루 빨리 성군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알 수 없는 법. 유배 2년째인 1506년(연산군 12) 엄계는 그의 아버지 엄산수와 둘째 형 엄회와 함께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목이 잘리는 참형을 당했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엄계와 같은 신하들이 많이 있었다. 언제 죽음의 명이 내려올지 모르는 유배생활 중에서도, 심지어 죽음의 명이 내려온 상황에서도, 그들은 임금에 대한 원망보다는 자신이 한 때 모셨던 임금이 역사에 남는 성군이 되기를 기원했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당시 성리학을 공부한 도학자 선비들에게 있어 이러한 출처관과 처세관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종반정 후 엄계는 아버지 엄산수, 귀인 엄씨, 둘째 형 엄회 등과 함께 신원되었으며,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증직됐다. 말 나온 김에 공신정 관련해 한 가지 확인을 하고 넘어가자. 일부 자료에서 이곳 공신정을 ‘공진정’으로 서술한 예가 많다.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된 제주도 공신정 관련 자료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도 후원 북장문의 이름을 공진정으로 기술한 부분이 있다. 이는 분명한 오류다. ‘공신’의 출처는 앞서 인용한 《논어》〈위정〉편이다. 한자 ‘辰’은 두 가지 발음이 나는 글자로 하늘의 별을 나타낼 때는 ‘진’이 아닌 ‘신’으로 발음한다. 일반적으로 하늘의 해와 달 그리고 뭇별들을 통칭하는 ‘日月星辰’을 ‘일월성진’이 아닌 ‘일월성신’이라 읽는 것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지금의 공신정은 1986년 중건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1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있으며 전면으로 반 칸 퇴 칸을 두었다. 대청에는 공신정 편액과 공신정기·공신정중수기·공신정상량문이 걸려 있으며, 종도리에 병인년(1986년) 4월 18일 상량했다는 글자가 남아 있다. 공신정 뒤 조금 높은 둔덕에 ‘증통정대부 공조참의 엄공 유촉비’가 서 있는데 이곳이 바로 엄계가 북향사배를 하던 단이 있었던 곳이다.
5) 에필로그
공신정 뜰 한 편에는 수령 200년으로 알려진 거대한 살구나무 한 그루가 보기 좋게 서 있다. 살구나무는 수령 100년을 넘기기도 힘들다고 하는데 공신정 살구나무는 지금도 해마다 많은 양의 살구를 맺고 있다. 공신정은 현풍휴게소 500년 느티나무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1분 정도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 물론 성하리 쪽에서도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