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화지팔방비(花之八坊碑)’. 이 말은 조선후기 화원지역 8개 방(坊)에 세워진 비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 방은 지금의 읍·면·동 정도 되는 행정단위다. 조선시대 화원현 8방은 화현내·인흥·감물천·조암·월배·옥포·법화·성평곡이다. 현 화원읍 성산리 화원 성명교회 남쪽에 작은 비각이 한 채 있다. 이곳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대구판관을 지낸 유명악의 선정을 칭송하는 선정비 8기가 한데 모여 있다.
2) 조선시대 고을수령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8도군현제’. 전국을 크게 8개 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고을의 규모나 군사적 중요성 등을 고려해 목·부·군·현 등을 두는 지방제도다. 8도는 종2품 관찰사[감사·도백·방백], 목과 대도호부는 정3품 목사와 대도호부사, 도호부는 종3품 도호부사, 군은 종4품 군수, 대현은 종5품 현령, 소현은 종6품 현감이 관할했다. 이 중 관찰사를 제외한 목사·부사·군수·현령·현감 등을 통칭 고을수령이라 한다. 고을수령은 왕을 대신해 관할지역의 행정·사법·군사에 있어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다. 반면 그에 상응하는 책무도 있었다. 특히 농상성(農桑盛·농업과 양잠), 호구증(戶口增·호구증가), 학교흥(學校興·학교를 일으킴), 군정수(軍政修·군정정비), 부역균(賦役均·부역균등) 사송간(詞訟簡·송사처리), 간활식(奸猾息·간교함을 그치게 함) 등 이른바 ‘수령7사’라 불리는 일곱 가지 중요한 책무가 있었다. 관찰사와 고을민은 이 수령7사를 기준으로 수령을 평가했다. 좋은 평가를 받은 수령은 임기 중, 혹은 임기 이후 고을 민들로부터 감사의 증표를 받았다. 바로 송덕비·선정비로 대표되는 고을 민들이 세운 ‘감사비’다. 다만 송덕비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 시각이 상존한다.[송덕비의 진정성 대해서는 ‘50. 알고 보면 흥미롭다. 달성군청 비림’편에서 이미 소개한 적이 있다]
3) 하늘이 내린 명 사또, 대구판관 유명악
고을수령직 중에 ‘판관’이라는 직도 있었다. 판관은 목·부 등 규모가 큰 고을에 파견된 종5품 관리로 수령을 보좌하는 부관의 역할을 했다. 대구는 1601년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경상도관찰사가 대구(도호)부의 수령직을 겸했다. 하지만 관찰사는 경상도 70여 고을을 모두 관할해야하는 탓에 대구부의 실질적 수령은 대구판관[혹은 도호부사]이었다. 조선후기 대구 판관 중에 유명악(兪命岳·1667-1718)이란 인물이 있었다. 본관은 기계, 자는 요경·군사, 호는 만휴정으로 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성증,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유철, 아들은 경상도관찰사와 우의정을 지낸 유척기다. 그는 청음 김상헌의 증손자인 삼연 김창흡의 제자이며, 우암 송시열을 존경하고 따랐다. 그의 자를 요경에서 군사로 바꾸어 준이가 우암이었다. 기사환국(1689)으로 우암이 제주도로 유배되자 변호 상소를 올렸고, 갑술환국(1694)으로 우암이 신원되자 비로소 관직에 뜻을 두어 1705년(숙종 31) 생원시에 급제했다. 이후 의금부 도사·장흥고 주부·사복시 주부·호조좌랑·호조정랑·개령현감·대구판관·순흥부사·청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1718년(숙종 44) 청주목사 재직 중 병환으로 관아에서 졸했다. 그는 중앙 관직보다 지방수령으로 있을 때 많은 치적을 남겼다. 특히 대구판관 시절(1713-1716) 선정으로 대구부민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흉년에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 주었고, 조세와 부역을 줄여주었다. 또 경상감영의 지원에다 자신의 녹봉을 보태 대구 석빙고를 건립했다. 당시 대구 빙고는 돌로 만든 석빙고가 아닌 초가지붕을 덮은 초개빙고였다. 그래서 3년 마다 한 번 씩 초가지붕을 이는 일이 부민들의 큰 부담이었는데 이를 해결해 준 것.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에 있는 대구 석빙고비에 당시 대구판관 유명악의 석빙고 건립내력과 그의 공적이 새겨져 있다. 그 외에도 수령이 교체될 때마다 지출되는 쇄마가(刷馬價) 폐단을 줄였으며, 미곡 창고였던 강창을 증설해 백성들의 편익을 도모했다. 유판관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전설도 전한다.
유명악이 대구판관 재직 시 큰 가뭄이 들어 부민이 도탄에 빠졌다. 기우제를 앞 둔 어느 날 그의 꿈에 어머님이 나타났다. ‘제사는 정성이 중요하니 반드시 하늘을 감동시켜야 응답이 있다’ 그는 어머님의 말씀에 느낀바가 있었다. 옛날 주나라 주공이 무왕의 쾌차를 기원하는 제사에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았던 고사처럼 자신을 기우제 제물로 삼기로 했다. 기우제를 지내는 날, 그는 장작더미에 올라갔고 아전들에게 불을 붙이게 했다. 그러자 하늘의 감응이 있었던 것인지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때부터 대구부민들은 그를 ‘하늘이 내린 사또’라 불렀다.
4) 화원 성산리 화지팔방비
대구판관으로 많은 치적을 남긴 유명악. 당시 대구부 33개 방(坊) 모두에서 부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그를 칭송하는 선정비를 세웠다. 그런데 특기할만한 것은 당시 대구에 세워진 유명악 선정비 대부분이 유판관 재임시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현재 대구에는 모두 13기의 유명악 선정비가 남아 있다. 경상감영공원에 1기, 화원읍 성산리 유명악비각에 8기,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에 4기가 있다. 이중 화원읍 유명악비각은 1993년 달성군이 화원읍과 달서구 일대에 산재해 있던 유명악 선정비를 한데 모은 것이다. 본래는 9기였는데 2002년 기계유씨대종회의 요청으로 1기를 대구 중구 경상감영공원으로 옮겼다. 현 비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8기의 비석이 3열로 놓여 있다.
5) 에필로그
우리 대구는 유명악 가계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4대에 걸쳐 대구에서 선정을 펼친 특별한 내력 때문이다. 유명악의 5대조 유강과 아버지 유철이 경상도관찰사를 지냈고, 자신은 대구판관을, 아들 유척기는 경상도관찰사를 2번이나 역임했다. 현존하는 대구수령 선정비로서는 유명악 선정비가 13기로 가장 많다. 유강과 유철의 선정비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아들 유척기의 선정비는 다사읍, 경북대 야외박물관, 경상감영공원, 문우관 상덕사 등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