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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19. 현풍 포교당과 불탑 이야기
  • 푸른신문
  • 등록 2020-05-2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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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달성군 현풍읍사무소 뒤편 주택가에 아담한 절집, 현풍 포교당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 말사 포교당이다. 본래는 비슬산 유가사 포교당이었다가 나중에 동화사 포교당이 됐다. 이 포교당 뜰에는 현풍읍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잘 생긴 3층 석탑 2기가 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인근 현풍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에 해체된 상태로 있던 것을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이번에는 현풍 포교당과 불탑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2) 불탑신앙과 불상신앙
탑 문화는 인도 전통의 화장문화에서 나왔다. 과거 인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고 남은 유골을 탑에다 봉안했다. 불(교)탑은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인도 불교에서 시작됐다. 석가모니 부처님 생존 시 부처님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봉안한 조발탑이 그 출발이다. 불탑이 신앙의 대상으로 본격화된 것은 석가모니 사후, 화장을 하고 나온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 등장하고서부터다. 이때부터 불탑을 숭배하는 불탑신앙이 불교의 주요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인도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불탑신앙도 그대로 넘어왔다. 그런데 초창기 인도와 중국 불탑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불탑과는 많이 달랐다. 가장 큰 차이는 규모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탑은 대략 사방 1-2m, 높이 5-6m 안쪽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초창기 인도·중국 불탑은 탑이 아니라 오히려 대형 건축물에 가까웠다. 우리나라 경우 현존하지는 않지만 신라시대 조성된 높이 약 80m에 달하는 경주 황룡사 9층 목탑과 현존하는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이 여기에 해당한다. 참고로 많은 이들이 팔상전을 탑이 아닌 전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팔상전은 엄밀히 말해 전각이 아닌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5층 목탑이다. 중국 탑은 처음에는 목탑으로 시작됐다가 나중에 벽돌탑, 이른바 전탑으로 발전했다. 중국에는 황토가 많아 나무보다는 벽돌로 탑을 만드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는 목탑이 유행했다가 나중에 석탑으로 대체됐다. 중국처럼 전탑이 아닌 석탑으로 발전한 것은 탑 재료로 황토보다는 돌을 구하기가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탑신앙은 이후 불상신앙에 자리를 내어준다. 신앙의 중심이 불탑에서 불상으로 옮겨간 것이다. 
 
3) 일탑과 쌍탑
사찰에서 불상을 모신 주건물을 금당(金堂)이라 한다. 황금빛 불상을 모셨다고 해서 금당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사찰에서 불상을 모셨던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처음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불탑을 사찰에 모시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후 부처님의 형상을 본뜬 불상이 등장하면서부터 불탑신앙이 불상신앙에 자리를 넘겨주게 된 것. 그런데 우리나라 사찰을 보면 금당 앞 탑의 개수가 다르다. 심지어 탑이 없는 사찰도 있다. 이유가 뭘까? 우리나라는 불교가 처음 들어온 삼국시대 때부터 탑과 금당 형식이 나라별로 차이가 있었다. 고구려계통은 탑 하나에 금당 세 개를 갖춘 ‘1탑3금당식’, 백제는 ‘1탑1금당식’, 신라는 ‘쌍탑1금당식’이었다. 사찰은 기본적으로 부처님을 모신 집이다. 따라서 한 사찰에는 1기의 불탑이 있는 것이 기본이다. 한 하늘에 하나의 태양이 있는 것처럼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도 한 구역에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법당 앞에 탑을 세워놓고 보니 탑이 부처님의 시야를 가리는 형국이 됐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중앙을 비워두고 뜰 좌우로 공평하게 2기의 탑을 세우는 쌍탑식이 된 것이다. 
…하지만 쌍탑이 만들어지면서 해탈문을 올라오는 사람은 곧장 불상을 볼 수 있게 됐다. 즉, 신앙에 대한 집중도 면에서 본다면 쌍탑은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사찰의 상징체계上》·자현스님·129쪽)  
  
4) 현풍 포교당 3층 쌍탑
현풍 포교당은 1908년 처음 창건됐다. 해인사의 변설호 스님이 유가사와 도성암을 왕래하면서 중계지 용도로 설립한 것이다. 이 포교당은 현풍읍내에서 유일하게 6·25한국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는 사찰이다. 1958년 김해운 스님이 대웅전과 요사를 중수하고, 1988년 국가지정 전통사찰로 지정되면서 독립사찰이 됐다. 이후 동화사 말사 포교당이 되었으며 성선 스님의 중창과 능설심담 스님을 거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췄다. 예전 현풍 포교당 법당은 관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원통전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지장보살을 모신 대웅전으로 바뀌었다. 이 포교당에는 대웅전·요사채·공양간을 제외한 다른 전각은 없다. 대신 대웅전 내에 지장·산신·칠성·독성탱화 등을 봉안해 해당 전각을 대신하고 있다. 한편 현풍 포교당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는 뜰에 
서 있는 잘 생긴 3층 쌍탑이다. 이 탑은 본래 인근 현풍초등학교 운동장 한 편에 완전히 해체돼 흩어져 있는 것을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당시 포교당 측이 현풍면·현풍초등학교 총동창회·현풍번영회와 1년 여 협의 끝에 2011년 해체 상태의 석탑부재를 기증받아, 2012년 복원불사를 시작, 2013년 9월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일부 유실된 탑신석·기단부·상륜부 등은 새것으로 교체했는데, 복원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잘 됐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무심코 보면 원형 그대로의 옛 탑인지 새 부재가 들어간 복원 탑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이 탑은 고려시대 3층 석탑 양식으로 추정되었고, 달성군 내 몇 안 되는 전통사찰의 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으며, 달성군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게 되었다…(현풍 포교당 유래 안내문 중에서)  
5) 에필로그 
《교남지》,《현풍읍지》등의 내용을 참고하면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현풍읍내 사찰을 해체하고 나온 부재를 관아·향교·서원 등의 건축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 대표적 예가 지금의 현풍향교 대성전 기단부다. 지역향토사학자들은 현풍향교에 사용된 이들 석조부재가 조선시대 현풍관아와 현풍향교 인근에 있다가 폐사된 현풍 금화사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현풍 포교당에 복원된 잘 생긴 쌍탑도 그 옛날 금화사 금당 앞 뜰에 세워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경내 한 편에는 17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공덕비도 1기 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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