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산중 절집을 가는 길에서 꼭 만나는 것이 있다. 시냇물과 다리다. 불가에서는 사찰 앞을 흐르는 물을 기준으로 성과 속을 나눈다. 사찰을 향해 물을 건넌다는 것은 속세에서 벗어나 해탈·피안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유가읍 양리, 비슬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유가사. 유가사 일주문 옆에도 대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예쁜 돌다리가 있다. 세상에서 ‘척진교’라고도 부르고 ‘만세교’라고도 부르는 홍예교다.
2) 무지개다리 홍예교
‘홍예교(虹蜺橋·虹霓橋)’ 홍과 예는 모두 무지개를 뜻하는 글자다. 두 글자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虹은 ‘뱀[虫]이 하늘을 뚫는다[工]’는 뜻의 수무지개, 蜺는 뱀[虫]과 아이[兒], 霓는 비[雨]의 아이[兒]로 암무지개를 뜻한다. 이처럼 홍예교는 하늘을 오르는 뱀의 형상을 상징화한 무지개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무지개다리라고도 한다. 형태를 보면 홍예석을 사용해 무지개 모양의 반원형 홍예를 틀고, 그 위에다 다듬은 돌로 석축처럼 쌓은 다음, 다시 그 안쪽에다 잡석 등을 채워 넣고, 맨 위에다 흙과 자갈을 깔았다. 반원형 홍예의 가장 높은 꼭지점에 들어가는 홍예석을 특별히 홍예종석이라 한다. 홍예종석은 경우에 따라 멍엣돌처럼 튀어나오게 하거나 또는 종석표면에다 용머리·글자 등을 새겨 넣기도 한다. 가끔은 홍예종석 안쪽이나 홍예측면에 용머리 조각을 끼워 넣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용생구자설’에 나오는 용왕의 여섯 번째 아들 공복[공하·범공]이다. 공복은 물가나 수로에 살면서 잡귀를 막는 용으로 알려져 있다. 3) 척진교에서 만세교로
대구시문화재자료 42호로 지정된 만세교에 서면 위·아래로 두 개의 다리가 더 있다. 아래쪽 다리는 양2리 내산동으로 연결되고, 위쪽 다리는 유가사로 연결된다. 이름 없는 아래쪽 다리와는 달리 위쪽 다리에는 척진교(陟眞橋)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척진은 진리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만세교의 옛 이름이 척진교였다는 사실이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273년 전인 1747년(영조 23) 지금의 만세교 자리에 척진교가 처음 놓였다. 이때의 다리는 나무로 만든 목교로 유가사에서 놓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 만세교 인근에 세워져 있는 척진교 비문에 근거한 것이다.[현재 척진교비는 마멸이 심해 전체적인 판독은 어려운 상태다. 그러나 일부 승려들의 법명정도는 확인이 가능하다.] 이후 1916년 목교인 척진교를 철거, 지금의 홍예교를 설치하고 이름을 만세교로 고쳤다. 이 내용은 아래쪽 다리 남쪽에 세워져 있었던 만세교 비문에 따른 것이다. 현재 만세교비는 아래쪽 반만 남아 있는데 척진교비 옆에 누운 채 반쯤 묻혀 있다. 이는 홍수 때 반쪽은 떠내려가고 반쪽만 남은 것을 마을주민이 수습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만세교 전신인 척진교는 유가사에서 놓은 것이 분명한데 반해, 만세교에 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다. 대부분 자료에서는 일본인 석공 구수노키[楠木]와 달성지역 석공들이 목교를 석교로 교체하고 만세교라 이름을 고쳤다는 내용뿐이다. 비슬산 대표사찰 유가사 입구에 놓인 이 만세교는 대체 누가 놓은 것일까?
4) 유가사 주지 박송파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시기, 유가 내산마을에 박송파라는 스님이 살았다. 내산마을은 만세교가 있는 바로 그 마을이다. 박송파의 본명은 박선준인데 이는 필자가 직접 내산마을 주민을 만나 확인한 내용이다. 박송파 스님은 1911년 12월 28일 발간된 일본총독부관보에 ‘현풍군 유가사 주지 취직인가’를 받은 것으로 나와 있다. 또 그는 앞서 다룬바 있는 쌍계리 용화사의 전신인 쌍계사를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만세교 이야기를 하다가 난데없이 박송파라는 인물을 언급하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다. 만세교 홍예석을 잘 살펴보면 ‘萬歲橋(만세교)’·‘大正五年三月日(대정5년3월일)’·‘朴松坡(박송파)’·‘李明玉(이명옥)’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중 유가사 쪽인 동편 홍예종석에 ‘박송파’, 서편 홍예종석에 ‘이명옥’이 새겨져 있다. 홍예석의 중심이자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홍예종석에 ‘박송파’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송파’라는 법명은 만세교 북편 마을회관으로 사용하는 컨테이너 뒤 바위글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송파 스님의 게송으로 보이는 바위글씨는 다음과 같다.
송파게(松坡偈)一念路 萬人度 萬歲橋 極樂橋(일염로 만인도 만세교 극락교)한 생각으로 만인을 구제하노니 만세교가 극락교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만세교에 대해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은 일제 때 일본인 석공이 중심이 되어 지역 주민이 함께 세웠다는 내용뿐이다. 그런데 살펴본 것처럼 홍예종석에 새겨진 ‘박송파’, 만세교 북편 바위에 새겨진 ‘송파게’ 등을 보면 박송파와 만세교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박송파가 1911년 유가사 주지로 취임한 사실이 있고, 만세교는 그로부터 5년 뒤인 1916년에 건립됐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할 것 같다.
유가 만세교는 1747년 유가사에서 처음 건설한 나무다리 척진교에 기원한다. 이후 1916년 척진교를 해체하고 지금의 홍예교 형식의 만세교를 세웠다. 만세교는 유가사 주지 송파스님이 주축이 되어 일본인 석공과 지역민이 힘을 합쳐 세운 것이다. 현재 만세교 인근에 옛 척진교비가 세워져 있고 그 곁에 반쪽짜리 만세교비가 누운 채 땅에 반쯤 묻혀 있다. 또한 만세교 북편 바위에 ‘만세교가 곧 극락교’라 읊은 송파스님의 게송이 새겨져 있다.
5) 에필로그
‘만세교가 곧 극락교’라 게송을 읊은 송파스님은 말년을 유가 내산마을에서 보내고 입적했다. 현재 내산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어린 시절 마을 어른들이 송파스님과 함께 어울리던 모습을 자주 접했으며, 지금은 고인이 된 송파스님의 아들, 손자도 이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만세교를 놓을 때 저의 할아버지께서 석공으로 참여했습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예전에 만세교 홍예 중앙에 종이 하나 달려 있었다고 해요’(이연직·74·내산마을)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