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57. 광산이씨 세거지, 씩실마을(2)

1) 삼처사를 키워낸 ‘맹모’, 고성이씨 부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삼처사(三處士) 용재 이홍기, 육일헌 이홍량, 모재 이홍우 3형제는 일찍이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 이수가 33세의 젊은 나이로 마산 합포 절도영에서 훈련원봉사로 재직 중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홍기·이홍량의 나이는 12세[이 둘은 쌍둥이다], 이홍우는 8세였다. 하지만 이들 3형제는 고령에서 마산에 이르는 200여리의 길을 단숨에 달려갔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목이 말라도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으며, 슬픔으로 곡을 하는 모습은 어른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이 모습에 감동한 마산 절도사는 장례에 필요한 물품과 인력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200리나 되는 운구도 수백 명의 군사들이 자진해서 도왔다고 한다.
한편 청상과부의 몸이 된 고성이씨 부인은 어린 세 아들의 교육에 남달랐다고 한다. 한 번은 “옛날 예에 과부의 자식은 취하지 말라하였는데, 이는 아비 없이 홀어미 아래에서 자라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너희들은 그릇된 행동으로 이 어미를 부끄럽게 하지 말라. 그것이 곧 효이니라.” 하고 가르치니 3형제가 울면서 명을 받들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고을사람들은 고성이씨 부인을 가리켜 ‘맹모(맹자의 어머니)’라 칭송했다. 3형제는 사후에 성주 회연서원 향현사와 봉양사에 제향 되었으며, 성주향안에 ‘삼세십이현’으로 등재되었다.
참고로 성주출신 대학자인 정구는 이들 3형제와는 처남매부지간이다. 당시 정구가 나이 21세가 되어도 장가를 들지 않자 형인 정곤수가 서울의 명문가에서 배필을 구하려했다. 이때 정구는 “나는 부귀한 집의 사위보다는 ‘이씨문’에 장가들기를 원합니다. 아들 3형제의 행실이 있으니 그 규문에서 자란 여인네 역시 어찌 그 도를 얻지 못했겠습니까!” 하고는 그 집에 장가를 들었다. 정구는 처남들과 사이가 매우 좋았는데, 처가에 한 번 오면 매양 한 달 가까이 머물렀다 돌아가곤 했다.

2) 광산이씨 씩실 입향조 이난미 그리고 이서, 이당

광산이씨 씩실 입향조 양촌 이난미는 이홍량의 아들이다.[마을 유래비에는 입향연도를 1612년으로 기록] 일찍이 고모부인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형인 이난귀와 함께 학문과 효도와 우애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이들 형제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삼달’이라 칭했다. 이는 『맹자』에 나오는 삼달존(三達尊)에 연유한 것으로 조정과 고을은 물론 세상에서도 존경을 받았다는 의미다.
동호 이서는 이홍우의 아들이다. 이난미와 마찬가지로 고모부인 정구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으며, 광해군 때 정구가 성주를 떠나 칠곡과 사수로 거처를 옮길 때 함께 하였다. 또한 정구의 명에 의해  『오선생예설분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정구가 졸하자 심상(心喪·상복은 입지 않으나 마음으로 근신함) 3년을 했다. 그 후 정구를 제향하는 회연서원과 신도비 건립에도 힘썼으며 정구의 문집과 서적을 간행하기도 했다. 본래 그는 지금의 고령군 성산면 고탄동에 살았다. 그런데 1620년 고모부이자 스승인 정구가 졸했다. 당시 상례·서원건립·문집발간 등의 일로 문인들이 회동을 할 때면 으레 고탄에 있는 이서의 집을 이용했다. 하지만 매번 많은 인원이 모여 공적인 일을 처리하기에는 그의 집이 부적합했다. 그래서 새롭게 적합한 장소로 낙점된 곳이 낙동강 건너 이곳 ‘씩실’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씩실에 서당을 짓고 씩실을 만년의 거처로 삼았으며, 스스로를 ‘동쪽 호숫가의 늙은이’라는 의미로 ‘동호야로’라 칭했다. 이후 1627년 천거로 벼슬에 나아갔으며,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을 할 때 인조를 호종했다. 이때의 공로로 중훈대부 의금부도사를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이서와 관련하여 특기할만한 것은 그에게 ‘덕요(德耀)’라는 사시(私諡)가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사시라는 것은 임금이 내려주는 시호와는 달리 고을의 선비들이 붙여준 호이다. 그는 사후 삼처사인 ‘이홍기·이홍량·이홍우’와 함께 회연서원 향현사에 제향 되었다. 끝으로 광거재 이당은 이홍기의 아들이다. 개항기를 전후한 시기에 그의 후손들도 씩실로 이거하여, 기존의 광산이씨 씩실 세거에 합류하였다. 

3) 양촌고택과 승호서당

씩실마을 한가운데 양촌고택(陽村古宅)이 있다. 씩실에 있는 건축물 중 입향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건축물인 이 집은 1613년 양촌 이난미가 건립했다고 한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뜰을 사이에 두고 제법 높은 축대 위에 사랑채와 그 뒤로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정면에서 마주보면 좌에서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좌에서부터 1칸 대청, 2칸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승호서당(承湖書堂)은 양촌고택 바로 뒤편에 있다. 슬곡 이난귀와 양촌 이난미 형제를 기림과 동시에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건립한 문중서당이다. 1795년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1963년 중수한 바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두 칸 마루, 좌우 각 1칸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촌고택과 승호서당 사이의 빈터에는 예전에 가묘[사당]가 있었는데, 현재 그 한 편에 가묘가 있었음을 알리는 묘지석이 서 있다.

4) 에필로그

1636년 이난귀의 나이 45세 때, 그를 비롯한 정온·조정립 등 인근 5개 고을 18명의 선비들이 모여 ‘범국회(泛菊會)’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는 음력 9월 9일 중양절 날 술잔에 국화를 띄워 마시던 옛 고사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임이 결성된 지 38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의 후손들에 의해 범국회는 지속되고 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