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민정신이 넘쳐나는 새하얀 ‘목화솜’ 보러 오세요~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는 원나라로부터 목화씨를 들여와 우리나라 의복사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문익점 후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달성군에서는 매년 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을 앞에 목화밭을 조성하는데 9월부터 새하얀 목화솜들이 주렁주렁 열린다. 올 봄에는 좀 더 대대적인 정비를 하여 목화밭 앞에 문익점의 대형 동상도 새롭게 세워졌다.
우리가 흔히 목화꽃이라고 부르는 하얀 솜뭉치는 꽃이 아니라 열매다. 목화꽃은 하늘하늘한 연분홍색 꽃인데 그 꽃이 진 자리에 하얗고 동글동글 귀여운 목화솜이 열린다.
문익점이 원나라로부터 목화씨를 붓두껍에 몰래 숨겨 가져왔다고 많이들 알고 있는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당시 원나라에서 반출금지 품목은 화약과 지도 두 가지 뿐 목화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럼 왜 이렇게 이야기가 와전된 것일까? 조선시대 대학자 김굉필이 문익점의 공을 기리는 시에서 ‘남몰래’라는 표현을 쓴 것에서부터 비롯되었고 이후 극적으로 부풀려 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익점의 업적이 퇴색되는 건 아니다. 당시 많은 사신이나 유학생이 원나라를 드나들었지만 아무도 목화씨를 가져와 백성들을 따뜻하게 입혀야겠다는 생각은 못했으니까. 오죽하면 사후 세종대왕이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의정에 추서하겠는가? 그리고 가져온 10개의 씨앗이 혹시 발아되지 않을까봐 각각 다른 성질의 토양에 분산해서 심은 건 매우 현명한 처사였다. 마침내 그중 한 곳에서 성공적으로 발아해서 목화솜을 생산해 냈지만 목화솜에서 실을 뽑아내는 것도 무척이나 힘들었다. 온 가족이 매달려 실을 잣는 기계를 만들고 그걸로 천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목화솜에서 실을 뽑는 기계 물레는 이를 발명한 문익점의 손자 문래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고, 베를 짠 손녀 문영의 이름을 따서 무명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9월부터 하얀 목화솜이 열리기 시작해서 온 밭이 새하얗게 변하면 달성군에서는 내년 봄까지 관광객을 위해 일부러 수확하지 않고 그대로 놔둔다.
땅에 떨어진 목화솜을 하나 주워 손에 대어보니 따뜻한 감촉이 느껴진다.
지금이야 목화솜을 비롯해서 양털, 오리털 등 따뜻한 옷감들이 넘쳐나지만, 그 당시 얇은 삼베옷으로 겨울을 나며 추위에 떨었던 백성들을 생각한 문익점의 따뜻한 애민정신이 새하얀 목화솜 밭으로 뭉게뭉게 넘쳐흐른다.

서순옥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