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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13. 국내 유일 원화여고 순영 척화비
  • 푸른신문
  • 등록 2020-04-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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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송선생! 달서구 원화여고 교정에 있는 척화비, 국내 유일 순영 척화비입니다” 한 달 전쯤 한 지인으로부터 받은 제보다. 제보자는 달서구 상인동에 거주하는 임병기씨(64)다. 문화유산답사 블로거인 그는 석탑·비 등 석조유물에 일가견이 있는 재야문화유산전문가다. 그는 전국에 현존하는 척화비 35기를 모두 직접 답사·조사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척화비에 대한 조사연구>(2015)라는 보고서를 작성한 바가 있다. 이번에는 원화여고 교정에 있는 순영 척화비에 대해 알아보자.   


  
2) 서양오랑캐를 배척하자


척화비는 서양오랑캐와의 화친을 배척하겠다는 조선 조정의 의지를 천명한 비로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에 의해 우리나라 전역에 일제히 세워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시 설치한 우리나라 척화비의 정확한 현황에 대해서는 현재 알려진 내용이 전무하다. 필자가 확인해보니 일부 극소수 척화비에 대한 단편적인 내용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전체 척화비를 대상으로 다룬 논문·보고서·단행본 등은 정말 없다. 신기하고 이상하고 황당한 일이다.
19세기 말 조선은 서양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풍전등화의 상황을 맞았다. 그런데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조선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끌었다. 흥선대원군은 제국주의열강을 상대하는데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서양세력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조선을 살리는 길이라 확신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 직후 반포했던 ‘선언’을 돌에다 새겨 전국 각지에 세울 것을 명했다. 이때 세워진 비가 1871년[신미년] 조선 전역에 세워진 척화비(斥和碑)다. 척화비문 맨 끝 ‘병인년(1866)에 (글을)짓고 신미년(1871)에 세우다’는 문구가 여기에 유래한 것. 그런데 현존하는 국내 척화비 35기 중 설치연도가 1871년이 아닌 예외가 1기 있다. 전북 고창현에서 세운 척화비로 비문에 임신년(1872년)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척화비 형태는 일률적이지 않고 각양각색이다. 비 몸돌은 장방형·비갈형·귀접이형 등이고, 머릿돌은 둥근지붕·전각지붕·방형지붕 등이며, 구미 황상동 마애척화비 경우는 아예 큰 자연석 한 편에다 글자를 새긴 형태다. 그러나 비문만큼은 일률적인 규정이 있었다. 현존 35기 척화비 중 단 2기만 제외하고는 비문이 모두 스물네 자의 같은 문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우리 후손들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그런데 이 스물네 자의 원칙에서 벗어난 예가 있다. 전북 고창 척화비와 대구 원화여고 척화비다. 이 두 비에는 스물네 자의 정해진 비문 외에 건립주체를 비에다 새겼다는 특징이 있다. 고창 척화비는 고창현감 이동석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조성했다는 내용이, 원화여고 척화비는 순영에서 세웠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3) 국내 현존 척화비 현황


2015년 8월 기준으로 국내에는 모두 42기의 척화비가 있다. 이중 복제품과 유사품을 제외한 순수 원형 척화비는 35기다. 주로 영남에 많이 남아 있고, 경기·강원·광주·대전·제주에서는 확인된 바가 없다. 또 척화비가 위치한 장소를 보면 학교(7)·유교공간(7)·공원(6)·관공서(5)·박물관(5)·천주교공간(1)·기타(4)로 확인된다.




4) 국내 유일 감영 척화비


현재 대구에는 모두 3기의 척화비가 있다.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에 있는 척화비는 자연석에 비문을 새긴 구미 황상동 마애척화비 형식의 복제품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척화비는 영천 신령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우리 고장 달서구 원화여고 교정에 있는 척화비는 1982년 ㈜금호실업 김영기 사장으로부터 기증 받은 것이다. 이중 원화여고 척화비는 매우 특별한 가치를 지닌 척화비다. 이 비는 머릿돌 부분이 절단되어 비문 일부가 떨어져 나간 상태인데, 남아 있는 비문 중에 의미심장한 글자가 있다. 비문 맨 마지막에 보이는 ‘순영입(巡營立)’이란 세 글자다. 이 세 글자는 앞서 언급한 척화비 기본 문구인 스물네 자 외에 추가된 글자인데, 이를 통해 중요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이 척화비 설립주체가 조선시대 지방최고행정기관이었던 순영[감영의 별칭]이라는 점과 이 비가 감영에 세워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근거로 조심스레 추정을 해본다면 아마도 원화여고 순영 척화비는 경상감영에서 조성해 경상감영에 설치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실 문화재라는 측면에서 보면 척화비는 그렇게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다. 현존 35기 척화비중 문화재로 등록된 것이 절반이 조금 넘는 정도라는 것만 봐도 그렇다. 따라서 전라감영·충청감영 등 먼 지역의 척화비가 대구까지 흘러 들어왔다기보다는 대구 경상감영에 있었던 척화비로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해보이기 때문이다. 현재 원화여고 순영 척화비는 상부 일부가 절단돼 훼손된 상태며, 높이 65cm, 폭 57cm, 두께 23cm, 재질은 짙은 청색 화강석이다.


5) 에필로그


원화여고 순영 척화비가 어떤 연유로 김영기 사장의 소유가 되었다가 원화여고로 기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경상감영 척화비임이 확인된다면 지금이라도 대구 경상감영 공원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송덕비를 모아 놓은 경상감영 비림이나 아니면 하마비 곁으로… 
“문화재는 본래 있던 제 자리에 있어야 빛이 나는 법이예요. 경상감영 척화비임이 확인되면 대구 경상감영공원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어요. 원품과는 별도로 훼손된 부분을 복원한 복제품과 함께 전시된다면 더 좋겠죠”(임병기씨)


※참고자료: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척화비에 대한 조사연구(2015), 임병기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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