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조선시대 현풍현은 지금의 현풍·유가·구지·논공 일대를 아우르는 큰 고을이었다. 현풍현은 동방5현 중 수현으로 칭송받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연고지인 만큼 유풍을 아주 중시하는 고을이었다. 이런 현풍 땅에서 예로부터 ‘채현풍’이라 불린 인물이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닌 현풍 땅에서 그것도 채현풍이라 불렸다하니, 모르긴 해도 대단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채현풍이라는 인물과 관련이 있는 현풍 평강채씨 문중의 등산재(燈山齋)라는 재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2) 평강채씨(平康蔡氏)
현재 우리나라의 채씨는 평강채씨와 인천채씨가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이중 평강채씨는 고려 고종 때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경평공 채송년(蔡松年)을 1세조로 한다. 본관을 평강으로 한 것은 시조 채송년이 평강군에 봉해진 것에 연유한 것이다. 평강은 철원 위쪽으로 지금의 북한지역 강원도 땅이다. 평강채씨 인물로는 ‘삼부자재상’으로 칭송받는 채송년과 그의 아들 채정·채화가 있으며, ‘4대8정승’이라 하여 채송년 이하 4대에 걸쳐 정승반열에 오른 8명의 인물이 있다. 또 세상에서 ‘탈필공(奪筆公)’으로 알려진 임진당 채세영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조선 중종·인종·명종 때 공조판서·호조판서·의정부좌참찬·대사성을 지낸 인물이다. 그가 탈필공이란 별칭을 얻게 된 데는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전한다. 성호 이익의 『해동악부』 「탈필공」에 소개된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때는 1519년(중종14) 기묘년이었다. 심정·남곤 일파에 의해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당시 사관이었던 채세영이 대궐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 여러 소인배들과 함께 중종을 모시고 어전에 있던 가승지[임시직 비서] 김근사가 채세영이 들고 있던 붓을 갑자기 빼앗았다. 이는 그 자리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명현들의 죄목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채세영은 임금이 보는 앞에서 도로 자신의 붓을 빼앗은 뒤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사관의 붓은 다른 사람이 함부로 쓸 수 없는 법입니다. 저는 간신(諫臣·간언을 하는 신하)이 아니기에 소임 밖의 일을 전하께 아뢰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그 죄명을 듣고자 합니다!” 이는 목숨을 건 언행이었다. 이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채세영을 일러 임금 앞에서 사필(史筆)을 빼앗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탈필공(奪筆公)’이라 불렀다.
영·정조 때 도승지와 육조판서는 물론 우의정·좌의정·영의정까지 두루 거친 남인의 영수 채재공도 평강채씨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3) 현풍고을의 평강채씨, 채현풍·도해옹
현풍지역에 살고 있는 평강채씨는 대부분이 조선 초 예조판서를 지낸 괴정 채충경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의 후예들이다. 이들 판서공파 인물들 중에 평강채씨 현풍 입향조이자, 제3대 현풍현감을 지낸 채석견(蔡石堅)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채현풍’이다. 그는 재임 시에 현풍 성하리에 사직단을 세우고, 유가면 가태리에 있던 포산 동헌을 지금의 현풍초등학교자리로 옮기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이에 현풍고을민들이 그를 ‘채현감·채현풍·읍선생’이라 칭송했다. 채석견의 증손자 채원희·채원우·채원복 3형제는 임란 때 의병으로 일어나 곽재우 장군 진영에서 활략한 인물이다. 채석견의 현손자 채안은 효자로 이름이 나 숙종 때 효자정려의 명이 있었다. 예전에 그의 효자각이 현풍 부리에 있었는데 1925년 도로가 생기면서 사라졌다. 채석견의 5세손에 호를 ‘도해옹(蹈海翁)’ 혹은 ‘율리처사(栗里處士)’로 쓰는 채팔개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병자호란 때 주전론을 펼친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삼전도의 굴욕’이 있자 스스로 벼슬을 내려놓고, 자손들에게도 과거공부를 하지 말 것을 명했다고 한다. 조정으로부터 한성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동해[海]를 밟아[蹈] 현풍으로 낙향한 그는, 스스로를 ‘도해옹’이라 자호하고 여생을 보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율리처사라 칭했으며, 그가 만든 ‘현풍유림계’는 이후 현풍유림계의 효시가 되었다.
4) 해옹정이 등산재로
등산재는 테크노폴리스로(路) 초곡터널을 현풍방면으로 빠져나와 첫 번째 만나는 사거리를 조금 지난 좌측 산비탈에 있다. 이 재실은 본래 유가면 쌍계리 구천가에 있던 해옹정이 도시개발로 사라지게 되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이름을 ‘등산재’로 바꿔 단 것이다. 등산재는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반 칸 툇간을 두었다. 전면 4개의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있고, 대청 벽면에는 등산재기·등산재상량문·시판 등이 걸려 있다. 경내에는 ‘현풍현감평강채공유적비’가 있으며, 솟을삼문에는 ‘첨모문’이라 편액이 걸려 있다. 채재공의 ‘율리징사(栗里徵士)’·‘의옹도해(義翁蹈海)’ 같은 친필 편액이 걸려 있던 옛 해옹정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강채문의 문풍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5) 에필로그
최근 테크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현풍·유가·구지일대는 개발과정에서 많은 전통문화유적들이 사라졌다. 살펴본 것처럼 현풍의 평강채문도 자신들의 재실 하나가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다. 물론 자리를 옮겨 새 재실을 다시 세웠지만, 이렇게 세워진 새 재실이 예전의 재실과 같을 수는 없다. 또 다시 오랜 세월 수많은 이들의 손때가 묻어야 예전의 해옹정과 같은 고졸한 멋이 묻어나는 유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