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달성군 가창면 최정산 남쪽 우록 1리에는 특이한 이름의 재실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삼감재(三柑齋)’요, 다른 하나는 ‘필분재’인데, 각각 사성김해김씨와 인천이씨 문중의 재실이다. 그런데 이 두 재실의 이름을 잘 살펴보면 옛 사람들이 재실의 이름을 어떤 식으로 명명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이 지은 건물의 이름은 ‘83타워’니 ‘광대[광주대구간]고속도로’니 하는 요즘의 이름과는 그 태생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이름 석 자에 형이하학을 넘어 삶의 철학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의미까지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다.
2) 모하당 김충선과 그 후예들
역사이야기를 하다보면 종종 ‘사성(賜姓)’이라는 표현을 만나게 된다. 사성은 성씨를 내려준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한자 ‘사’는 반드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줄때만 사용할 수 있는 글자다. 그래서 주로 임금이 아랫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내려주었을 때 이 글자가 사용된다. 임금의 명으로 현판이 내려진 사액서원,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인 사패지 등이 그 예다. 이처럼 사성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임금으로부터 성씨를 하사받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왕조시대에 그것도 임금으로부터 성씨를 하사받는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말 대단한 영광이었다.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는 모하당 김충선 장군을 제향하는 녹동서원이 있다. 그런데 익히 알려진 것처럼 이 서원에 제향된 김충선이라는 인물은 좀 특이한 내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의 부하장수로 조선에 들어왔다가 항복하고 조선에 귀화, 임진란 내내 조선의 편에 서서 큰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 공으로 선조 임금으로부터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성과 이름은 물론 김해라는 본관까지 하사받았다. 본관을 김해로 한 것은 바다를 건너온 모래를 걸러 금을 얻었다는 의미인데, 김충선의 일본명이 사야가(沙也可)인 것을 감안하면 일리가 있는 설명이다. 이후 그는 우리 고장인 우록리에 정착해 조선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그로부터 4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록리는 김충선 장군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마을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참고로 ‘사성김해김씨’라는 말은 기존의 김해김씨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이다.
3) 삼감처사 김진영과 삼감재
김충선은 슬하에 5남을 두었다. 5남 중 장남인 김경원은 다시 7남을 두었는데, 이 중 2남이 사성김해김씨 11개 파 중 하나인 삼감공파 파조 김진영(金振英)이다. 그의 자는 군칙, 호는 삼감처사이며, 관직은 증직으로 통정대부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으로 이름이 났다. 8세 때 할아버지 김충선의 장례에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예법을 잘 지켜 당시 절제사였던 이운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재계했으며, 기제사와 묘제에는 3일간 재계했다. 어머니인 인동장씨가 돌아가시자 3년 시묘를 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할아버지를 시종했던 아버지의 건강이 쇠약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수혈을 하기도 했다. 또한 부친상에 3년 시묘를 하는 동안 하도 많은 피눈물을 흘려 상복을 3벌이나 고쳐 입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는 평생을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학문에 정진했으며, 문집으로는 『삼감재실기』 1권이 있다. 그는 만년에 동산에다 귤나무 3그루를 심고, 그 아래에 2칸 규모의 작은 거처를 마련한 뒤 스스로를 ‘삼감처사’라 칭했다. 세월이 흘러 삼감재가 퇴락하자 1914년 3칸 규모로 중건했다가, 1975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중수했다. 삼감재는 솟을대문을 낀 흙돌담 안에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가운데 2칸은 대청이요, 좌우 각 1칸씩은 방인데 좌측 방은 이사실(以思室), 우측 방은 추모당이다. 전면의 다섯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으며, 솟을 대문에는 경지문, 건물에는 삼감재·이사실·추모당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4) 세 그루의 귤나무와 세 아들
삼감처사(三柑處士)라는 말은 3그루의 귤나무와 함께 시골생활을 하는 선비라는 의미다. 현재 삼감재에는 삼감재의 내력을 기록한 삼감재기(김진영)·삼감재중건기(박승동)·삼감재중건상량문(이화상) 등이 걸려 있다. 그런데 이 세 글에 모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가 있는데 바로 ‘세 그루의 귤나무’와 ‘세 아들’이다. 그 내용을 대강 요약하면 이러하다.
삼감재 김진영이 집 근처 동산에 귤나무를 심은 것은 자신의 선조인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는 의미다. 왜냐하면 김충선의 고향이 귤나무가 자라는 남쪽 나라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귤나무를 세 그루 심은 것은 자신의 아들 3형제가 근본을 잊지 않고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김진영은 할아버지 김충선이 평생 동안 고향땅 일본을 그리워했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할아버지의 고향에서 자라는 귤나무를 집 가까이에 심고 가꿨던 것이었다. 그것도 타고난 성품과 기질이 각기 달랐던 세 명의 아들들이 부디 근본을 잊지 않고 올바르게 성장하기를 염원하며 세 그루를 가꿨던 것이다.
5) 에필로그
삼감재에 가면 일단 삼감재·이사실·추모당 편액을 잘 살펴볼 일이다. 이 세 편액이 모두 한말 서예가로 유명한 회산 박기돈 선생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마음의 눈을 열고 하나 더 살펴보자. 다름 아닌 삼감재의 세 그루 귤나무를 말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