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우리나라의 전통종교라고 할 수 있는 유교·불교·무속 등은 오랜 세월 우리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이는 수천 년 동안 유교·불교·무속 등이 우리 전통문화의 큰 줄기를 형성해 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이들 종교 유적지 중 극락왕생의 부처님, 아미타부처를 모신 비슬산 수도암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수도암은 유가사에서 도성암으로 가는 길 초입에 있다.
2) 극락왕생의 붓다 아미타불과 극락전
불교와 유교의 두드러진 차이 중 하나는 세계관이 일원론이냐 이원론이냐는 것이다. 유교가 신들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일원론적 세계관이라면, 불교는 신들의 세계를 인정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녔다. 특히 불교 신들의 세계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신들의 세계는 올림푸스산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적 세계이다. 이에 반해 불교 신들의 세계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적 세계에다 수평적 세계를 함께 갖췄다.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답게 불교의 세계관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복잡다단하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존재를 ‘붓다[부처]’라고 한다. 그런데 신이 하나뿐인 기독교와는 달리 불교에서는 시·공간적으로 수많은 붓다가 존재한다. 불교에서는 누구든지 노력하면 붓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몇 대표적인 붓다를 예로 들어보면 시간적인 측면에서는 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인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불이 있고, 공간적인 측면에서는 서방의 아미타불과 동방의 약사여래불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수많은 붓다의 존재는 단 한 분의 또 다른 붓다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붓다가 바로 석가모니이다.
수많은 붓다들 중에서 모든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한 붓다는 ‘아미타불’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은 천당과는 조금 다르다. 천당이 오직 즐거움만이 있는 곳이라면 극락은 즐거움에다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의 기쁨까지 함께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수도암 주법당의 이름이 극락전이다. 법당의 주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셨기 때문에 극락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사찰에서 법당의 이름을 정하는 데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어느 붓다를 주불로 모셨느냐에 따라 법당의 이름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알아보기로 하자.
3) 불교의 저력을 엿보다, 심우도
수도암 극락전 외벽에는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다. 다른 말로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하는 이 그림은 팔상도와 함께 주로 법당 외벽에 많이 그려지는 불화이다. 송나라 곽암선사의 작품으로 알려진 심우도는 깨달음을 찾아가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아가는 것에 비유한 그림이다. 모두 10장으로 구성된 심우도에는 불교가 지향하는 바가 잘 담겨 있다.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해 문자가 아닌 그림을, 나를 따르라가 아닌 내가 너에게로 가겠노라는 불교 특유의 독특한 생각과 자세 같은 것들 말이다. 이는 유교가 좀처럼 따라갈 수 없고 흉내 낼 수 없는 불교만의 고유한 특징이다.
심우도의 1번 그림은 ‘심우(尋牛)’이다. 어린 동자가 고삐를 쥐고 소[깨달음]를 찾아 나서는 모습이다. 2번은 ‘견적(見跡)’이다. 동자가 소발자국을 발견한 모습이다. 3번은 ‘견우(見牛)’, 동자가 소를 발견한 모습이다. 4번은 ‘득우(得牛)’, 비로소 동자가 소를 잡았다. 이때 소의 털빛은 모두 검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음을 나타낸 것이다. 5번은 ‘목우(牧牛)’, 소를 길들이는 모습이다. 소의 털빛이 앞쪽 절반이 흰색으로 변했다. 6번은 ‘기우귀가(騎牛歸家)’, 동자가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다. 그런데 피리를 자세히 보면 구멍이 없다. 깨달음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7번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는 사라지고 없고 동자만 남아 있다. 깨달음에 있어 더 이상 도구[소]가 필요 없음을 의미한다. 강을 건너고 나면 배가 필요 없듯이 말이다. 8번 ‘인우구망(人牛俱忘)’, 소도 동자도 모두 사라지고 둥근 원[ㅇ]만 남았다. 주와 객이 하나가 된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우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직 2장의 그림이 더 남았기 때문이다. 9번 ‘반본환원(反本還源)’, 이 그림에는 산과 물을 주제로 하는 한 폭의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깨달음 이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음을 의미한다. 10번 ‘입전수수(入廛垂手)’,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시장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다. 이는 깨달음이 끝이 아니라 깨달음 이후에는 세상으로 나아가 중생들을 구제해야 함을 의미한다. 필자는 처음 심우도 10번 입전수수를 접했을 때, 정말이지 소름끼치는 전율을 경험한 바가 있다. 8번 인우구망에서 이미 모든 깨달음을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본환원을 거쳐 시장 바닥의 중생들 속으로 들어가라니. 정말 놀라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화엄사상과 법화사상이 이미 둘이 아님을 심우도는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4) 에필로그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염불이 있다. 여기에서 ‘나무’는 의지한다·귀의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부처와 관세음보살에 귀의한다는 의미이다. 아미타불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중생을 구제하는 붓다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을 스승으로 삼고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보살이다.
‘모든 중생이 그 이름을 들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염불하거나, 그렇게 열 번 하는 사람이 극락정토에 왕생하지 못한다면, 나는 붓다가 되지 않겠다.’ [아미타불 48대 서원중 제18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