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연주현씨 집성촌 홀개마을, 낙은재와 당산나무
1) 프롤로그
지난주에 이어 현풍읍 오산리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자. 오산리에는 ‘말뫼’와 ‘홀개’ 두 곳의 자연부락이 있다. 지난주에 오산1리 말뫼를 소개했으니 이번에는 오산2리 홀개에 대해 알아보자. 현풍에서 대니산 방향으로 원오교를 건너 800m쯤 직진하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 좌측에 카페로 운영 중인 옛 현풍초등학교 포산분교가 있고, 정면에 오산2리 마을 표지석이 보인다. 표지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홀개마을이다. 처음 보이는 작은 마을은 외동[바깥마]이고, 800m쯤 골짜기 안으로 더 들어가면 큰 마을 내동[안마]이 있다.
2) 320년 내력 연주현씨 집성촌
달성군 현풍읍과 구지면에 걸쳐 있는 대니산 자락에는 많은 자연부락이 있다. 이들 자연부락은 특징이 있는데 대부분 개별 성씨 집성촌이란 점이다. 홀개 역시 마찬가지다. 홀개는 우리나라에서 드문 성씨 중 하나인 ‘연주현씨(延州玄氏)’ 집성촌이다.
현재 우리나라 현(玄)씨는 고려시대 인물인 ‘현담윤’을 시조로 하는 연주현씨 단일본이다. 하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현씨 본관은 연주·성주·창원·순천 등 기록에 의하면 무려 106본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본이 많은 것은 전국에 흩어진 후손들이 자신들의 세거지를 각자 본관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연주현씨 단일본이 된 것은 조선 후기 영조 때였다. 종족들이 나서 본이 다른 여러 현씨를 연주현씨 단일본으로 정리하는 것에 합의한 결과다.
시조 현담윤(玄覃胤)은 평안도 연주[지금의 영변] 출신으로 고려 의종 때 장군을 지내고, 명종 때 장남 현덕수와 함께 ‘조위총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다. 이때의 공으로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르고, 연산군에 봉해졌다. 그가 봉군된 연산이 곧 연주인데 연주라는 본관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 현담윤은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1남 현덕수의 후손은 성주현씨, 3남 현덕유의 후손은 창원현씨, 현덕수의 2남 현원미의 후손은 순천현씨 등으로 분관됐다.
『고려사절요』 12권에는 현담윤과 그의 장남 현덕수에 대한 기록이 여러 번 나타난다. ‘조위총의 난 때 북방 40여 성이 모두 조위총 편에 섰으나 현담윤이 수령으로 있던 연주만 동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적을 패배시켰다’, ‘집 매매과정에서 현덕수와 노극청이 서로 의리를 지켰다’, ‘여자로 변장해 부녀를 간음한 간사한 무당을 현덕수가 벌한 일’ 등이 대표적이다.
3) 홀개 입향조 현만극을 기리는 낙은재
‘디지털달성문화대전’을 비롯한 여러 향토사자료에는 홀개마을을 “1620년경 연주현씨 현만극이란 선비가 처음 개척해 홀산이라 불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관계를 확인해보면 입향 시기에 오류가 있다. 홀개 입향조 현만극이 1662년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홀개 입향은 1620년이 아닌 1700년 전후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홀개 안마을 입구 서쪽 길가에 몇 기의 묘와 비가 있다. 입향조 현만극과 그의 아버지인 현경준의 묘 그리고 성국 현기택 행적비 등이다. 이중 현만극 묘 앞에는 2기의 비가 있는데 하나는 1942년 조성한 한문으로 된 옛 비, 다른 하나는 옛 비문을 한글로 번역해 2001년 새로 새운 비다. 비문 일부를 발췌 요약하면 이렇다.
대니산 송정(松亭)에 있는 이 묘는 낙은처사의 묘다. 그는 연주현씨 17세손으로 성명은 현만극(玄萬極), 자(字)는 충건(忠建), 호는 서호(西湖) 혹은 낙은(洛隱)이다. (중략) 아버지는 성균생원으로 참봉인 현경준이고, 어머니는 보성오씨다. 현만극은 현종 임인년[1662년] 천안 도종리에서 태어나 백사(白沙) 윤훤(尹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윤훤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할 때 그를 따라 경상도를 왕래하면서 현풍을 눈여겨 봐두었다가, 후에 대니산 아래에 있는 이곳 홀산으로 이거 입향조가 됐다. 여생을 이곳에서 은둔하며 처사로 산 그는 부인 전주이씨와의 사이에서 5남을 두었다.
홀개마을 중심에 마을회관이 있고 그 곁에 눈에 띄는 큰 규모의 재실 한 채가 있다. 홀개 입향조 현만극을 기리는 낙은재(洛隱齋)다. 솟을삼문을 갖춘 낙은재는 정면 5칸, 측면 2.5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 5칸 모두 유리창호를 설치했다. 뜰 한쪽에 부속채가 한 동이 있고, 본 건물 뒤편에 수령 100~200년 정도 되는 키 큰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낙은재 편액은 석촌 윤용구의 글씨다.
4) 홀개 할배나무와 할매나무
여느 자연부락처럼 홀개마을에도 마을 수호신이 깃든 당산나무가 있다. 홀개 당산나무는 할배나무와 할매나무 두 그루다. 할배나무는 홀개마을 목우지 뒤편 산등성이에 있는 소나무로 곁에 맑은 물이 솟는 샘이 있다. 할매나무는 느티나무인데 홀개 바깥마와 안마 사이 길가에 있다.
할매나무는 수령 300년, 높이 8m, 밑 둘레 4.8m, 직경 1.5m의 거목으로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됐다가 현재는 해제된 상태다. 이 나무는 바닥에서 1m 높이에 지름 약 1m가 넘는 큰 구멍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숯덩이처럼 불에 탄 흔적이 뚜렷하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마을 아이들이 나무구멍에 불을 놓은 바람에 지금처럼 구멍이 커졌다고 한다. 현재 할매나무는 오래된 굵은 가지는 대부분 죽고 잔가지만 남아 있어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 그래서 지난 1982년 4월 5일, 후일을 기약하며 할매나무 곁에 2세목 한 그루 심어 마을에서 관리하고 있다.
홀개에서는 지금도 동제를 지낸다. 예전처럼 격식을 갖추지는 못하지만 음력 정월 보름날 마을 뒷산에 있는 할배나무에 먼저 동제를 지내고, 이어 할매나무에 지낸다. 할매나무는 축대를 쌓아 제단 형식을 갖췄는데 제물을 진설하는 상석이 특별히 눈에 띈다. 윗면이 평평한 자연석인데 30여 개가 넘는 성혈(星穴)이 새겨진 성혈바위다. 고대인의 기원의식 흔적으로 알려진 성혈바위가 마을 당산나무 제단으로 옮겨져 기원의식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참 흥미롭다.
5) 에필로그
마을이름 홀개·홀포에서 ‘개’와 ‘포’는 나루를 뜻한다. 실제로 예전에는 홀개마을 앞 낙동강변에 나루가 있었다. 그렇다면 ‘홀(笏)’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홀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조정의 신하들이 임금을 뵐 때 양손을 모아 쥐는 작은 기물로 조정의 관리를 상징한다. 홀개마을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몇 개의 작은 산줄기가 남에서 북으로 ‘물(勿)’ 자 형으로 마을 쪽으로 뻗어 있다. 대니산 정상을 ‘竹’으로 마을을 ‘勿’로 보면 마을은 ‘笏’ 자 형국이 된다. 그래서 마을 뒷산을 홀산이라 하고 마을을 홀개라 한 것 같다. 정만극의 호 낙은은 낙동강가에 은거한다는 뜻인데, 공교롭게도 홀산 아래에 은거한 것을 보니 후일을 기약하는 뜻도 있었던 것 같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