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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호유적 탐방] 197. 현풍읍 오산리 이천서씨 집성촌 말뫼마을과 추모재
  • 푸른신문
  • 등록 2021-12-23 13:5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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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향토사를 공부하다보면 자연부락명을 접할 기회가 많다. 과거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자연부락명은 이름을 정하는데 특별한 원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변 자연환경을 담을 수도 있고, 전설이나 인물 혹은 풍수지리 등과 관련되는 수도 있다. 이름에 사용된 문자도 그렇다. 한글도 있고 한자도 있고, 한글과 한자가 섞인 것도 있고, 오래된 순우리말을 쓰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일까. 자연부락명은 현대식 지명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낯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자연부락명이 얼마나 인간친화적이고 인문학적으로 세련된 표현인지 알 수 있다. 현풍읍에는 오산 1·2리가 있다. 1리는 예로부터 ‘말뫼’, 2리는 ‘홀개’로 불렸다. 이번에는 오산1리 말뫼마을과 말뫼에 있는 추모재에 대한 이야기다.

2) 말뫼마을 말무덤 전설
현풍시장에서 도동서원방면으로 2km쯤 가면 원오교가 있다. 왼쪽에는 현풍원오파크골프장, 오른쪽은 낙동강이다. 이쯤에서 파크골프장 뒤 대니산 쪽을 보면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이 하나 보인다. 오산1리 말뫼마을이다. 말뫼는 ‘말무덤·맘마듬·말미·마묘(馬墓)’ 등으로도 불리는데 모두 말무덤[말뫼]에서 파생된 말이다. 무슨 사연이 있어 마을이름을 말뫼라 했을까? 여기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하나 전한다. 『달구벌 문화 그 원류를 찾아서2』(차성호)에 소개된 내용을 조금 각색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진주강씨와 영월엄씨가 마을을 개척할 때였다. 어느 집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이상했다. 아기가 숨을 쉴 때마다 방문이 열렸다 닫혔다한 것. 이를 두고 마을에 장수 기질을 지닌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이 나라님에게까지 알려질까 두려워 부모는 아기를 다듬이돌로 눌러 죽인 뒤 성짓골에 생매장했다. 얼마 뒤 이번에는 마을에 명마가 한 마리 태어났다. 하지만 명마는 자신의 주인을 만나지 못했고 뒷산에 올라 서럽게 울다가 죽었다. 마을사람들은 한을 품고 죽은 아기장수가 명마로 태어났다가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죽은 것이라 여겼다. 결국 마을사람들은 죽은 명마를 마을 뒷산에 묻어주고 그곳을 말뫼[말묘]라 불렀다.

참고로 말뫼를 ‘아리까새’라고도 한다. 새가 알을 까고 나오는 형국을 닮았다는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3) 이천서씨 공도공파 현풍문중 대표 집성촌
우리나라 서(徐)씨는 크게 이천서씨·달성서씨·대구서씨가 있다. 이들 세 서씨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서로 간에 약간 이설이 있어 어느 하나로 정리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보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아닌 일반인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정도로만 이해해도 된다.
이천서씨·달성서씨·대구서씨는 본관은 각기 다르지만 ‘서신일(徐神逸)’이라는 최고(最古) 시조의 후손이라는 점은 서로 인정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을 시조로 이천서씨 계보를 계속 이어갔고,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는 고려시대 인물인 서진과 서한을 각각 시조로 하는 달성파와 대구파 형태로 분파되었다가, 다시 달성서씨·대구서씨로 분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달성서씨를 향파, 대구서씨를 경파라고도 하는데 이는 주요 연고지가 각각 지방과 중앙이라는 것에 따른 것이다. 참고로 이들 세 서씨의 연고지는 뚜렷하게 나눠진다. 영남권은 달성서씨·대구서씨, 호남권은 이천서씨가 우세하다. 현재 대구에서 이천서씨 집성촌으로는 말뫼가 유명하다.
어쨌든 우리나라 모든 서씨의 시조인 서신일은 흥미로운 전설을 지닌 인물이다. 『고려사』 「열전」 ‘서희전’과 서신일 신도비명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인 신라말 효공왕 시절,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효양산 아래에 ‘만주’라는 인물이 살았다. 하루는 화살을 맞은 사슴 한 마리가 달려와 만주 앞에 쓰러졌다. 뒤이어 사냥꾼이 쫓아와 사슴의 행방을 묻자 만주는 모른다고 답했다. 만주는 사슴을 치료해주고 다시 산으로 돌려보냈다. 그날 밤 만주의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대가 나의 아들인 사슴을 살려주었으니 보답을 하고 싶다. 앞으로 그대의 자손들은 대대로 경상의 벼슬이 이어질 것이며, 그대가 죽거든 내 아들을 살린 그 자리에 묘를 쓰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 뒤 신라왕이 효양산으로 사냥을 왔다. 몇 일간 만주가 길 안내와 몰이꾼을 했고, 그 공으로 왕으로부터 ‘서씨’ 성을 하사 받고 벼슬까지 얻었다. 만주는 이 모든 일이 신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 생각해 스스로 이름을 신[신]의 가호로 편안함[일]을 얻었다는 뜻의 ‘신일’이라 고쳤다. 그 후 장가들어 나이 팔십에 이르러 아들을 얻었으니 ‘서필’이고 서필의 아들이 ‘거란과의 담판’으로 유명한 고려 명장 ‘서희’ 장군이다. 신라에서 아간벼슬을 지낸 서신일은 아들 둘을 놓고 82세로 세상을 떠나 효양산에 묻혔다.

말뫼 입향조 서일손을 기리는 추모재
부귀는 바다 같기를_ 추모재 추녀 마구리 기와 문양


4) 말뫼 입향조 서일손과 추모재
이천서씨 말뫼 입향조는 서일손[徐逸遜·1644년생·이천서씨 25세]이다. 이천서씨 공도공파 파조인 서선의 10세손으로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다. 현 말뫼 주민 증언에 의하면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은 이천서씨 집성촌이었고 현재도 한두 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천서씨만 살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일부 향토사 자료에는 진주강씨와 영월엄씨가 처음 말뫼를 개척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말뫼 가장 안쪽 좌측 산기슭에 추모재(追慕齋)라는 재실이 있다. 이천서씨 말뫼 압향조 서일손을 기리는 재실이다. 언제 처음 건립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건물은 대청 종도리에 적힌 상량문에 따르면, 단기 4301년 무신년[1968년] 3월 9일 묘시에 기둥을 세우고, 3월 10일 사시에 대들보를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정면 4칸, 측면 1·5칸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반 칸 퇴를 두었다. 가운데 두 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은 방이다. 대청에 ‘추모재’ 편액과 이종림이 지은 ‘추모재기’가 걸려 있다.

5) 에필로그
말뫼 추모재는 여느 시골마을에 남아 있는 대다수 재실처럼 그리 특별한 것은 없다. 그런데 추모재를 둘러보고 돌아 나오는 길에 번쩍하고 필자의 눈에 띤 것이 있었다. 전면 기와지붕 양쪽 추녀모서리에 달린 마구리 기와 문양이었다. 위쪽에는 화분에 심은 꽃이, 아래쪽에는 바다 ‘海’자가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경상북부지역에서는 상을 당하면 종이에 ‘海’자를 써서 위아래를 거꾸로 해서 방문 위쪽에다 붙이는 풍속이 있다. 그런데 이건 그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해답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목숨은 산과 같이 부귀는 바다와 같이’ 라는 뜻의 ‘수여산(壽如山) 부여해(富如海)’에서 부여해를 그림[부귀의 꽃 모란]과 문자[海]로 표현해 놓은 것이었다. 어느 분의 아이디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참 멋지고 세련된 표현방식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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