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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96. 논공읍 남리 옛 절터[일명암지·솔봉사터]
  • 푸른신문
  • 등록 2021-12-16 13: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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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사지’, ‘○○암지’라는 말이 있다. 한자로는 ‘寺址·庵址’다. 이는 과거에 불교 사찰이나 암자가 있었던 빈 터를 말한다. 우리 고장에도 이런 사(암)지가 많다. 특히 신라·고려시대 불교 성지였던 비슬산을 끼고 있다 보니 더욱 그렇다. 비슬산 자연휴양림 안에만 해도 염불암지·금수암지·용봉동 석불입상지 등이 있고, 비슬산 전체로 보면 골짜기마다 여러 사암지가 산재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암지는 깊은 산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풍읍 귀비사지·관음사지, 구지면 고봉리 일명사지, 옥포읍 김흥리 일명사지·본리리 일명사지, 화원읍 본리리 인흥사지 등도 있다. 하긴 7년 전만해도 비슬산 대견사 역시 대견사지였다. 몇 회에 걸쳐 논공읍 문화유적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는 중이다. 이번에는 논공읍 남리 한국폴리텍대학 뒷산 기슭에 남아 있는 한 암자 터에 대한 이야기다.

2) 일명암일까? 솔봉사일까?
우리나라의 사암지 명칭을 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유독 ‘일명사지’가 많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고봉리 일명사지·김흥리 일명사지·본리리 일명사지 등이 좋은 예다.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이 오해를 한다. 과거 그 자리에 있었던 절 이름이 ‘일명사’였다고.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일명사는 한자로 ‘잃을 逸, 이름 名, 절 寺’, 이름을 잃어버린 절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절터는 확인되었지만 그 터에 있었던 절 이름은 알 수 없어, 관례 상 지명을 앞에 붙이고 ‘일명사’라 이름 한 것.
남리 옛 절터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자료에서는 ‘논공읍 남리 일명암지’로 소개되어 있고, 일부 자료에서는 그냥 ‘남리 사지’로 되어 있다. 이 곳 역시 절터임은 확인이 되지만 절 이름은 알 수 없어 ‘일명암지’라 이름 한 것이다. 일명사가 아니고 일명암이라 한 것은 터의 규모가 작아 절이라기보다는 작은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남리 일명암지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다 새로운 내용 하나를 접했다. 알려지지 않은 일명암의 이름을 제시한 자료였다. 논공지역 문화유적을 소개하는 다음 카페 ‘bookdong14’에서 자신을 남리 토박이로 소개한 운영자 백 모씨는 일명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솔봉사터(率鳳寺址): 다른 이름으로 일명사터라고 한다. 남1리 동쪽 산 19번지 산 능선 60m 지점에 솔봉사(일명사)터가 있다. 그곳에는 방형의 돌담이 둘러져 있으며 절터위에는 작은 불상을 안치하고 촛불을 피워 기도처가 되어있다. 남쪽 담장에 건립된 입석(立石)에는 나무(南無) 2자가 음각되어 있는데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을 새기려고 하였던 듯하다. 저의 부친은 어릴 때 절 건축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후 절은 무너지고 잠시 산지기가 살다가 떠난 후에는 잡초가 우거진 잡초 밭이 되어 있었다. 제가 ‘소풀’을 하러 갔다가 우연히 절터를 답사한 적이 있다.

석축만 남아 있는 남리 일명암지
오른쪽 입석에 南無 두 글자가 보인다


3) ‘南無’만 새긴 미완성 입석
현재 남리 일명암지에는 돌로 쌓은 석축 두 줄과 입석(立石) 4기 그리고 높이 약 30cm 정도 되는 작은 불상 한 기만 확인이 가능하다. 해발 약 100m 산기슭에 있는데 지금은 거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남아 있는 석축을 통해 일명암지를 추정해보면 일명암지는 정면에서 마주보았을 때 좌우보다는 상하가 좀 더 긴 역사다리꼴 형태다. 아래쪽과 위쪽에 각 한 줄씩 있는 석축으로 볼 때 대지는 상단·하단 2단으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또 맨 위쪽 좌측 모서리와 맨 아래쪽 우측 모서리 아래로 별도의 소규모 석축이 있는데 용도는 알 수 없다.
이곳에는 지금도 입석이 몇 기 서 있다. 『달성군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1997)에는 모두 5기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현재는 4기다. 높이는 약 100-150cm, 폭은 50cm 쯤 된다. 이 중 하나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南無’ 두 글자인데 자세히 보면 ‘無’ 자가 미완성이다. 아래에 붙는 ‘연화 발[灬]’ 네 점 중에서 한 점만 찍혀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무아미타불이나 나무관세음보살 등을 새기려다 무슨 연유인지 완성을 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무’라는 말은 고대 인도어인 범어의 ‘나마스’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존귀한 대상을 따르고 그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나무관세음보살과 나무아미타불은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의미다.
한 뼘 이상 쌓인 참나무 낙엽을 뒤지며 주변을 살펴보니, 낙엽 속에 일으켜 세우면 입석이 될 만한 돌이 몇 개 더 보인다. 어쩌면 본래 세워뒀던 돌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쓰러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4) 폐사 후 민간 기도처
남리 일명암지는 ‘이름을 잃어 버렸다’는 명칭처럼 암자의 이름도, 또 언제 폐사가 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앞서 잠깐 언급한 논공 토박이 백 모씨의 기술을 참고하면 20세기 초까지는 암자 건물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남아 있는 축대와 터를 고려하면 옛 일명암의 건물배치는 단순했던 것 같다. 상단에 법당 한 동이 있고, 하단은 그냥 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낙엽을 뒤져가며 하단 쪽 바닥을 살펴봤지만 석탑부재에 해당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남리 일명암지를 소개한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이 있다. “…이들 입석은 선사 유적에서 보는 그러한 성격의 입석이 아니라, 기도처로서 민간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이렇다. 과거 어느 때인가 이 자리에 불교 암자가 있다가 사라졌고, 이후 암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마을주민들에 의해, 이곳이 민간신앙 성격의 기도처로 활용된 것 같다는 말이다. 충분히 일리가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골마을에는 돌기둥을 세워두고 ‘미륵불’이라 칭하며 민간신앙을 이어가는 곳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남리 일명암지는 찾는 이가 거의 없다. 일명암지와 논공읍은 서로 빤히 내다보이는 거리[200~300m]지만 그 사이로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이 관통해 접근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5) 에필로그
필자의 답사계획수첩에는 예전부터 남리 일명암지가 적혀 있었다. 매번 논공읍 관련 자료를 들추다보면 꼭 빠지지 않고 이곳이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인연이 닿지 않다가 최근 세 번에 걸친 답사 끝에 힘들게 일명암지를 찾았다. 앞서 두 번은 고생만 했고, 세 번째 도전 끝에 성공했다. 혹시라도 필자 같이 고생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일명암지를 찾는 요령 하나를 제시한다.
“일명암은 논공 남리 한국폴리텍대학 옆 성요셉병원에서 정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고압선 철탑 바로 옆에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논공읍을 기준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건너편이란 점이다. 따라서 일찌감치 성하4리 마을회관에서부터 고속도로 동쪽으로 나 있는 옛 길을 따라 올라가야 찾을 수 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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