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지난주에 논공읍 낙동강변에 있는 ‘논공 3대 늪’을 소개했다. 말 나온 김에 논공읍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할까한다. 논공읍에는 현재 아홉 개 법정리가 있다. 인구로만 보면 북리·남리·금포리·삼리리·노이리·위천리·상리·하리·본리리 순이다. 이중 달성보와 성산대교 사이 북쪽 왕영산 자락에 자리한 마을이 상리다. 약산온천이 있는 하리에 비해 조금 위쪽에 있다 해서 상리다. 이번에는 상리와 상리 자연부락 걸미마을에 있는 나호재에 대한 이야기다.
2) 산새가 걸출해 ‘걸뫼·걸미’
현재 상리는 주민이 사는 마을보다 공장이 차지한 면적이 훨씬 더 넓은 공장지대다. 상리는 남쪽 낙동강변에서 시작해 북쪽 왕영산 쪽으로 올라가면서 하동·중동·상동으로 구분된다. 하동·중동은 이미 공장지대가 됐고, 상동도 서쪽 골짜기에 자리한 안골은 공장이 거의 점령했으며, 동쪽 골짜기 걸미마을만 옛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걸미라는 마을 명은 옛날 이 마을에 살았던 여양진씨 진연남이라는 선비로부터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과거공부를 하기 위해 이 마을에 들어온 그는 뒷산 왕영산(旺嶺山) 산세를 보고 ‘뛰어날 걸(傑)’ 자를 써서 산 이름을 걸산[혹은 乬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부터 걸산 아랫마을이 ‘걸미’라 불렸다. 걸미는 상리 세 마을인 하동·중동·상동 중 상동에 있다. 상동 마을입구에 마을 당산나무인 수령 400년 느티나무와 마을 못인 상동지가 있다. 상동지에서 걸산 쪽으로 좌측 골짜기에 안골, 우측 골짜기에 웃골이 있다. 안골에는 주로 성주이씨와 경주최씨가 살았고, 웃골에는 김해김씨가 살았다.
김해김씨가 웃골에 처음 터를 잡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김정’이라는 인물 때부터였다. 본래 그의 집안은 경남 창원에서 대대로 살아왔는데, 1710년(숙종 36) 경 창원을 떠나 지금의 걸미로 옮겨온 것. 처음에는 걸미 아래쪽에 살다가 시끄러운 세상을 피하고자 걸산 자락 깊숙이 지금의 웃골까지 올라와 터를 잡았다고 한다. 300여 년이 지난 지금, 상리는 김정이 터를 잡은 웃골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역이 공장지대가 됐다. 참고로 웃골은 6·25한국전쟁 때만 해도 약 90호 정도가 살았는데, 김해김씨들은 대부분 문중 재실인 나호재 주변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3) 나호 김정을 기리는 ‘나호재’
김정(金定·1690-1731)은 자가 가술, 호는 나호(螺湖)다. 김해김씨 걸미 입향조인 그는 글을 읽는 선비였지만 시끄러운 세상이 싫어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고, 오로지 산골에서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을 읽는 처사의 삶을 살았다. 나호라는 호는 걸미마을 시내에 고둥[고디]이 많아 ‘소라 나’ 자를 써 나호라 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그가 처음에는 걸미 아랫마을에 살다가 더 조용한 곳을 찾아 지금의 웃골로 거처를 옮겼다는 문중 구전을 참고하면, 또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소라는 단단한 껍질 속에 제 몸을 감추고 사는 어패류다. 어떠한 경우에도 죽기 전까지는 몸을 껍질 밖으로 내놓지 않는다. 마치 단단한 껍질 속에 몸을 깊숙이 감춘 소라처럼 은거하며 살겠다는 의지를 ‘나호’ 두 글자에 담았을 수도 있다.
나호재[논공읍 상리548]는 걸미마을 웃골에서도 골짜기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해 있다. 처음 나호재는 1720년(숙종 16) 경 김정이 건립한 서당이었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이 걸미 입향조인 김정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재실 나호재를 세웠다. 지금의 나호재는 1931년에 건립한 것을 2010년에 중수한 것이다. 현 건물을 1931년에 건립한 것으로 보는 것은 대청 종도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신미년 정월’이란 상량문 때문이다. 60년 마다 돌아오는 간지를 고려하면 상량문의 신미년은 1871년 아니면 1931년이다. 그런데 현재 건물 양식을 고려해보면 1931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나호재는 정면 4칸, 측면 1.5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씩은 방이며, 전면으로 반 칸 툇마루를 두었다. 전면 기둥 5개는 모두 원기둥을 썼는데 가운데 기둥 2-3개는 훼손이 심해 2010년 중수 때 새로 교체했다. 처마 네 꼭지부분에는 건물 바깥으로 길게 뻗은 추녀를 받치기 위해 별도 기둥인 활주를 대어 보강했다. 나호재 대문은 정면 3칸 솟을대문으로 가운데 1칸은 대문, 좌우 각 1칸씩은 화장실과 창고인데 2010년 중수 때 새로 건립한 것이다.
4) 여양진씨와 장군정 전설
걸미마을에는 예로부터 ‘장군정’에 얽힌 전설 하나가 전한다.
과거 걸산 인근에 장군정이라 불리는 샘이 있었다. 장군정 일대는 여양진씨(驪陽陳氏)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장군정의 물이 좋아서인지 이 마을에는 힘센 장사가 많이 났다. 세월이 흘러 장군정 인근 여양진씨 문중은 크게 번창했고, 어느 때부터인가 여양진씨는 점차 인근 마을 사람에게 세력을 과시하며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결국 진씨네 횡포를 견디지 못한 마을 사람들은 도력이 높은 도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도사는 “진씨네가 번창하는 것은 다 장군정 물 때문이니 장군정을 메워버리면 그 길로 진씨네는 망하고 마을을 떠날 것이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도사의 말을 듣고 어느 날 밤 몰래 장군정으로 가서 샘을 흙으로 메워 버렸다. 이날 이후부터 진씨네에서는 더 이상 장사가 나지 않았고 결국 진씨네는 마을을 떠났다.
이 전설은 약간 다른 버전도 있다. 임란 때 진씨네 젊은 장사가 왜적 두 명을 맨 손을 때려잡아 머리를 선조 임금께 바친 적이 있었다. 임금이 기뻐 후한 상을 내리며 소원을 물었다. 이때 장사는 “지 소원은요, 임금이 되는 김니더”라고 답을 했다. 신하들이 놀라 장사를 죽여야한다고 하자 선조는 웃으며 “무식한 백성이니 죽일 필요는 없다”며 장사 등에 ‘진왕(陳王) 진첨지(陳僉知)’ 다섯 글자를 써 붙여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다. 현재는 걸미마을 주민 중에 진씨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호재 인근 왕영산 기슭에는 지금도 진씨 문중 산소가 많이 남아 있다.
5) 에필로그
나호재 대문 바로 앞집에 나호재를 관리하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살고 있다. 김정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평생을 이곳에서 사신 분이다.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나호재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6·25한국전쟁 때 이야기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전부 피났을 갔었어. 나중에 돌아오니 집은 전부 불타고 한 집도 남은 집이 없었어. 인민군이 불태운 것이 아니라 국군이 불태웠다고 했어. 당시 전황이 불리해 국군이 물러나고 인민군이 마을에 주둔해야하는 상황이 되자 국군이 퇴각하면서 민가를 불태웠다고 해. 그런데 웃골에서는 유일하게 우리 재실은 살려두었더군. 대문채는 불탔는데 재실은 남아 있었어. 그리고 당시 재실 뒤편 왕영산 정상에는 미군들이 많이 주둔해 있었어…”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