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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고 답하다] 아름다운 추억
  • 푸른신문
  • 등록 2021-08-12 14: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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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필자가 군에 있을 때, 중대급에는 상사 계급의 행정보급관이 있었다. 내가 중대장 시절에는 ‘인사계’라고 호칭하였는데 중대장을 보좌하여 병력 및 부대관리를 주 임무로 하는 부사관 이다. 당시 우리 중대의 인사계는 이상국 상사였는데 나이가 나의 큰형님과 같은 연배였다. 나는 계급을 떠나 그를 친형님처럼 존중하고 배려했다. 그리고 부임한지 며칠지난 어느 날 “우리 둘이 합심하면 사단 최고의 중대가 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중대지휘에 대한 나의 견해를 설명했다. 이상국 상사는 성정이 매우 성실하고 사람이 진국 그 자체였다. 중대장과 함께 의기투합을 하고나니 그는 물불 안 가리고 중대를 위해 헌신적으로 근무했다. 중대 병사들을 당근과 채찍으로 단 한건의 불미스런 일 없이 효과적으로 관리하였으며, 마당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외형 건물만 있던 중대를 안팎으로 내실 있게 가꾸어 부대답게 만들어 놓았다. 그 덕분에 나는 중대의 작전계획을 세심하게 수립하고 중대원들을 최정예 전투원으로 훈련시킬 수 있었다.
이상국 상사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중대장님, 저는 중대장님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런데요, 제가 소위를 달 일이 있겠습니까? 준위를 달 일이 있겠습니까? 제가 중대장님께 충성하는 것은 진급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중대장님은 이 다음에 크게 되실 것 같은데, 제가 중대장님께 충성하지 않으면 중대장님이 높은 계급이 돼서 우리 하사관(지금은 부사관) 후배들을 혼내주실 것 같아 저는 중대장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직업관이 투철한 부사관 인가? 지금도 나는 부사관들을 만날 때 마다 옛날에 이렇게 훌륭한 선배가 있었노라고 얘기해 주곤 했다.
내가 중대장 보직을 마치기 얼마전인 1989년에 이상국 상사와의 재미있는 인연 거리가 생겼다. 그 해에 하사관 계급제도가 바뀐 것이다. 그 당시 하사관 최고의 계급은 상사였는데 그 위에 원사계급이 신설되어 한 계급 더 진급할 수 있는 제도가 생긴 것이다. 우리 인사계가 입버릇처럼 얘기 했듯이 소위나 준위를 달 일은 없었지만 원사계급을 달 수 있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러한 계획이 공고된 후 어느 휴일날 나는 중대로부터 차로 2시간 넘게 걸리는 연대본부로 가기 위해 중대 앞을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고 연대본부에 도착하여 연대장님께 면담을 요청했다. 연대장님께서는 깜짝 놀라며 나를 맞았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렸다. “이 번에 원사 진급제도가 생겼는데 우리 인사계처럼 오지에서 근무하는 하사관을 진급시키지 않으면 앞으로 누가 열악한 부대에서 근무하려고 하겠습니까? 우리 인사계를 꼭 진급시켜 주십시오.” 그 해 우리 연대에서 단 2명이 원사로 진급했다. 연대본부의 주임상사와 우리 인사계인 이상국 상사. 연대장님께서 나의 건의를 들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중대를 떠나 영관장교를 거쳐 나는 2010년 장군으로 진급하였다. 장군 진급 후 나는 내가 이렇게 장군으로 진급할 수 있었던 것은 나만의 노력이 아니라 그동안 나와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웠을 때 나와 좋은 인연을 맺어 내게 도움을 주었던 이상국 인사계가 생각이 나서 연락을 취하였다. 인사계는 전역 후 경북 영주에 살고 있었다. 나는 2012년 7월 아내와 함께 심혈을 기울여 만든 감사장을 들고 영주에서 가장 좋은 음식점을 인터넷에서 찾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해 드리며 감사장을 드렸다. 감사장을 받아든 내외분은 매우 감격해 마지 않았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추억이 그 어디에 있겠는가.

구용회 건양사이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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