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문진에서 사양정사까지, 운림구곡
운림구곡(雲林九曲)은 조선후기 대구를 대표하는 문신이자 학자였던 경도재(景陶齋) 우성규[禹成圭·1830~1905] 선생이 설정하고 경영한 구곡이다. 선생은 낙동강·금호강·진천천이 만나는 사문진에서 대구 북구 사수동까지 금호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구곡을 설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거처인 월촌[상인동]을 경유하는 진천천을 매개로, 금호강에서는 한강 정구를, 낙동강에서는 퇴계 이황을 떠올렸다. 이처럼 선생은 낙동강·금호강·진천천 물줄기를 따라 자신의 학문적 뿌리이자 이상인 선배 대학자를 만나고, 그 감회를 구곡시에 담았다. ‘운림’은 지금의 경북 칠곡군 지천면 웃갓[신동·상지] 마을의 옛 이름이다. 웃갓은 한강 정구를 기리는 사양서당[옛 사양서원]이 있는 곳으로 마을을 가로지르는 ‘이언천’이 다사읍 박곡리 해랑교 북쪽에서 금호강에 합류한다.
○ 제1곡 용산(龍山)
사문진과 화원동산 상화대 일원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왕이 꽃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란 뜻에서 상화대라 이름 짓고, 아홉 번이나 왕래했다고 해 구래·구라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화원동산 입구 우측 산기슭에 임재 서찬규 선생이 강학했던 낙동정사가 있다. 서찬규는 우성규와 더불어 한말 대구를 대표하는 큰 선비였다. 우성규는 「낙동정사기」에서 이황·류성룡·정구·장현광·서사원 등의 학문이 낙동강을 통해 대구에 들어와 화려하게 꽃 피웠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이 지역은 과거 선비들의 뱃놀이였던 선유(船遊)가 이루어졌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1899년 우성규·서찬규·이종기 등이 이곳에서 ‘낙강 상화대 선유’를 한 사실이 있다.
○ 제2곡 어대(漁臺)
금호강과 진천천이 합수하는 구라리 제방 끝에 있는 벼랑이다. 진천천은 대구 앞산 달비골에서 시작해 우성규의 고향인 상인동 월촌과 진천동을 지나 어대 인근에서 금호강에 합류한다. 우성규는 진천천이 금호강·낙동강과 이어지는 어대를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연원이 정구[금호강]·이황[낙동강]과 맞닿아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 제3곡 송정(松亭)
달성습지 일원이다. 지금은 금호강 제방과 성서산업단지조성으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송정은 소나무 숲을 말한다. 과거 이 지역은 큰비만 오면 지금의 성서일대까지 모두 물에 잠기는 상습침수구간이었다. 산업단지 조성 이전만 해도 이곳에는 퉁두꼬·우뚬·잘래기·알뜸·등거티 등의 낮은 언덕이 이어져 있었다. 이 중 가장 높은 언덕이 ‘개상덤’인데 지금의 성서체육공원 내에 있는 언덕이다. 개상덤에는 지금도 마을 당산나무가 있다. 송정은 이들 언덕 중 어느 하나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 제4곡 오곡(梧谷)
성서공단 금호강변이다. 4곡을 읊은 시 첫 구절에 ‘사곡이라 외로운 오동 바위 곁에서’라는 표현이 있다. 아마도 130여 년 전 우성규 생존 시만 해도 이 인근에 큰 바위가 있었고, 그 곁에 외로이 우뚝 솟은 오동나무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 제5곡 강정(江亭)
디아크와 강정보가 자리한 죽곡리 강정마을 인근이다. 강정은 과거 이곳에 있었던 유서 깊은 정자 부강정(浮江亭)에서 유래됐다. 이 일대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신라시대 때 왕이 찾아와 노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강정은 다사팔경 중 하나인 강정의 버드나무 숲을 노래한 ‘강정유림’으로도 유명했고, ‘서호병십곡’에서도 제1곡으로 다뤘다. 하지만 아쉽게도 부강정은 임란 때 크게 훼손되었다가 병자호란 이후 사라져 지금은 없다. 수년 전 달성군에서 부강정 복원 계획을 세운 바가 있다.
○ 제6곡 연재(淵齋)
강창교 대구 쪽 북편 산기슭에 있는 이락서당(伊洛書堂)이다. 이락서당은 1798년(정조 22) 대구의 ‘9문중 11촌(村) 30인’ 선비들이 한강 정구와 낙재 서사원을 기리며 건립한 서당이다. 이락서당 뒤 금호강변에 ‘관란대’라 불리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다. 절벽 아래에 깊은 못[소]이 있고 그 위에 이락서당이 있어 연재라 칭한 듯하다. 이락은 이수[금호강]와 낙수[낙동강]를 말한다. 이는 북송시대 학자 정호·정이 형제가 이수와 낙수 사이에서 학문한 것에 유래한 표현이다. 유학의 도통을 정리한 주자의 『이락연원록』의 ‘이락’ 역시 같은 표현이다. 우성규는 공맹의 학문이 이곳 대구에서도 활발히 전개됐음을 연재[이락서당]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 제7곡 선사(仙槎)
다사에서 하빈으로 넘어가는 마천산 고개 초입 이천삼거리 일원이다. 이곳에는 과거 신라시대 때 창건한 고찰 선사암이 있었다. 선사암은 난가대·세연지 같은 고운 최치원 유적이 남아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불교공간이었던 선사암은 유교공간인 선사재[선사서사]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일설에는 선사재 자리에 세운 것이 지금의 이강서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 제8곡 봉암(鳳巖)
해랑교와 맞닿아 있는 와룡산 용머리 일원이다. 금호강 쪽으로 ‘U’ 형인 와룡산 안쪽 방천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400년 내력 문화류씨 세거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세거지 자리에 대구시위생매립장이 들어서 있다. 과거 방천리 앞 금호강변 넓은 백사장과 밤나무 숲은 대구시민의 인기 있는 쉼터였다.
○ 제9곡 사양서당(泗陽書堂)
사수동 한강근린공원에 있는 사양정사다. 사양정사는 대구 유학 중시조격인 한강 정구 선생이 생전에 강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선생 사후인 1651년(효종 2) 제자들이 이곳에 사양서당을 건립, 1694년(숙종 20) 다시 칠곡군 지천면 웃갓[신동]으로 옮겨 사양서원으로 승격시켰다. 근래 사수동이 아파트단지로 개발될 때 섬뫼숲 일대를 한강 선생을 기리는 한강근린공원으로 조성하고 숲 정상부에 사양정사를 복원했다.
2) 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길
낙동강·금호강·진천천이 합류하는 제1곡 용산, 우성규의 고향 월촌을 경유하는 진천천 하류인 제2곡 어대, 지금은 과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달성습지와 성서산업단지 인근인 제3곡 송정과 제4곡 오곡, 부강정이 있었고 신라왕이 노닐었다는 제5곡 강정, 정구와 서사원을 기린 이락서당 제6곡 연재, 최치원 유적 선사암이 있었던 제7곡 선사, 와룡산 용머리 제8곡 봉암, 정구를 기린 제9곡 사양서당.
우성규 선생은 한말 대구를 대표하는 문신이자 유학자였다. 그런 만큼 자신이 설정하고 경영한 운림구곡을 통해 분명 이황·정구·서사원 같은 대선배 유학자의 발자취를 살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운림구곡을 꼭 그러한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사문진에서 사양정사까지는 금호강변으로 자전거도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한 번이라 이 길을 다녀와 본다면 왜 이곳에 구곡을 설정했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대도시 대구에 지금도 이런 공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다음에 계속>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