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현재 우리 고장 달서구에 서원이 몇 개나 있을까? 병암서원·용강서원·낙동서원 세 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몇 개였을까? 병암·용강·덕동·화암 네 개였다. 네 서원은 모두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 때 사라졌다가 이후 복원됐다. 병암·용강서원은 본래 자리에 본래 이름으로 복원됐고, 덕동서원은 자리를 조금 옮겨 낙동서원으로 복원됐다. 그런데 화암서원은 복원을 하면서 본래 있었던 달서구 장기동이 아닌 북구 노곡동으로 옮겨졌다. 선정 백인관이라는 인물을 제향한 옛 화암서원은 지금의 ‘웃는얼굴 아트센터’ 뒤 주자창 쪽에 있었다. 지금도 주차창 안쪽 산기슭 초입에는 그곳에 화암서원이 있었음을 알리는 ‘화암서원구지(華巖書院舊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본군의 토성(土姓)이 다섯이니, 백(白)·하(夏)·배(裵)·서(徐)·이(李)이며, 내성(來姓)이 하나이니, 도(都)이다.
2) 우리나라 백씨 내력
위는 『세종실록』 「지리지」 ‘대구군 성씨’ 조 첫 문장이다. 대구군의 토성으로 첫머리에 ‘백씨’가 놓여 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본군은 수성현·하빈현·해안현 등을 제외한 지금의 대구 중심부를 말한다. 어쨌든 560여 년 전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 백씨가 대구 토성으로 등재된 것으로 봐서는 백씨가 대구에 터를 잡은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 성씨 중에는 시조가 중국 사람인 예가 많다. 본관이 ‘수원’ 단일본인 우리나라 백씨 역시 마찬가지다. 『수원백씨보감』(대구백우회)에 소개되어 있는 수원백씨 역사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만성통보』·「제왕전승성원도」·「백씨원류세계」 등을 종합해보면 중국과 우리나라 백씨는 모두 황제[黃帝·전설상의 고대 중국 제왕]의 후손이다. 우리나라 백씨 시조는 송계 백우경이다. 그는 중국 소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이부상서를 지냈다. 하지만 간신배의 모함으로 780년(선덕왕 1) 신라로 건너와 정승을 지냈다. 말년에 경주 자옥산 아래에 만세암과 영월당을 지었는데, 선덕왕이 친림해 만세암은 정혜사로, 영월당은 경춘당으로 개명하고, 시와 현판을 내린 사실이 있다. 그곳에서 향년 73세로 서거, 자옥산 남쪽 기슭에 묻혔다. 이후 묘는 잃어버렸다가 1966년 후손들이 되찾았다. 시조 이후 중시조인 중랑장 백창직까지는 세대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수원백씨대동보에는 시조 백우경 이하 백창직 윗대까지는 세대를 계산하지 않고 ‘선대’로 모시고, 중시조 백창직을 1세로 하여 세대를 계산하고 있다.
3) 수원백씨 대구 입향조 백인관
수원백씨는 현재 29개 파로 분파되어 있다. 그중 제일 큰집, 이른바 백파는 ‘선정공파’다. 선정공파는 선정(禪亭) 백인관[白仁寬·1341-1421]을 파조로 한다. 백인관은 수원에서 태어났으나 말년을 대구 북구 노곡동에서 보냈으며, 지금도 그의 묘소와 그를 제향하는 화암서원이 노곡동에 있다.
수원백씨 11세인 백인관은 자가 사달(士達), 호는 선정이다. 공민왕 때 생원에 올라 관직은 이부전서 집현전 대제학에 이르렀다. 여말선초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부모를 모시고 수원으로 낙향했다. 당시 그는 도은 이숭인·목은 이색 등과 교분이 있었다. 이후 조선이 세워지고 태종이 세 번이나 벼슬을 내리기 위해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한 때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자 단지주혈[손가락을 그어 피를 드림]을 해 회생시켰으며, 어머니 상에 3년 여묘를 살았다. 이후 수원을 떠나 경북 선산으로 거처를 옮겨 야은 길재와 교유하였으며, 다시 대구 노곡으로 거처를 옮겼다. 노곡 선정재에서 말년을 보낸 그는 향년 81세로 졸했다. 사후 정헌대부 호조판서에 증직됐으며, 선정이라는 호는 선정재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용하고 한적함을 취한다’는 뜻이다.
4) 장기동 화암서원 유허지
백인관 선생 사후 368년이 지난 1789년(정조 13) 대구 장기동에 화암서원이 세워졌다. 화암서원은 백인관을 주향, 그의 후손인 노암 백문연·금암 백용채를 배향한 서원이다. 위치는 지금의 ‘웃는얼굴 아트센터’ 뒤편 주차장 안쪽 산기슭 초입이다. 이처럼 옛 화암서원이 선생이 말년을 보낸 선정재와 선생 묘소가 있는 노곡동이 아닌 장기동에 건립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서원 창건 당시 장기동 인근인 평리·중리동 일대에 수원백씨가 많이 살았고, 동시에 이 지역 수원백씨 문중세가 튼튼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지금도 화암서원 옛 터 산자락에는 수원백씨 묘소가 많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화암서원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피하지는 못했다. 1871년 사라졌으니 80여 년 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126년이 지난 1997년 화암서원은 본래 자리인 장기동이 아닌 노곡동으로 옮겨 복원됐다. 여기에도 사연이 있었다.
당시 노곡동 화암서원이 복원될 자리에는 퇴락한 경선재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경선재는 수원백씨 대구 입향조 백인관이 노후를 보낸 곳이며, 경선재 바로 뒤편에 선생 묘소가 있다. 문중에서 이 점을 주목해 노곡동 경선재 자리에 화암서원을 복원한 것이다. 이렇듯 장기동 시대를 마감하고 노곡동 시대를 연 화암서원은 어쩌면 제자리를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
장기동 시대 화암서원 모습이 어땠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래서 현 노곡동 화암서원을 통해 옛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현재 화암서원은 외삼문인 모송문(慕松門)을 열고 들어가면 뜰을 중심으로 강당인 경선재와 동재 수덕재(修德齋), 서재 박학재(博學齋)가 있다. 강당 뒤편에 내삼문인 진도문(進道門)이 있고 진도문 너머에 사당인 숭의사(崇義祠)가 있다.
5) 에필로그
수원백씨 중앙종친회는 지난 1997년 중국 정부와 ‘염황문화연구회’의 공식 초청을 받아 중국을 방문했다. 방문기간 중 수원백씨 중앙종친회는 ‘헌원황제대제’를 직접 주관해 봉행했다. 그리고 중국 현지 백씨와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수원백씨 시조 백우경이 당나라 시성 향산 백낙천과 사촌간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후 1999년, 2000년, 2001년 세 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해 현지 백씨를 통해 고증자료를 수집하고, 섬서성 위남시 하규에 위치한 백씨능원과 진나라 명장 백기와 향산 백거이 묘소 등도 참배했다. 1만 여 평에 달하는 백씨능원은 중국·한국·싱가포르·대만·기타 동남아시아 백씨들이 중국 정부 협조를 받아 조성한 것이다. 성씨도 세계화, 글로벌화 시대를 맞은 것 같다. 동양철학에서는 돌고 도는 것이 우주변화의 이치라고 한다. 화암서원과 수원백씨 내력을 살피다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