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연과 함께 살아왔다.
그리고 자연은 언제나 사람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이곳 대구광역시 달서구, 아파트 숲과 도로 아래에는 2만 년에 이르는 인간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돌과 물, 나무뿐이지만, 그 속에는 무병장수를 빌던 간절함과 자식을 신에게 맡기던 절실한 삶, 그리고 마을 공동체가 함께 지켜온 기억이 살아 숨 쉰다.
이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 우리는 달서구의 오래된 돌과 지명을 연구해 온 향토사학자 이국성 씨를 만났다.
달서구 곳곳에 남아 있는 선돌(입석)과 중방지, 한샘청동공원, 그리고 그 이름에 담긴 이야기들은 단순한 유적을 넘어,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의 역사’다.
진천동 입석 : 진천동에서 선돌을 세운 주위로 석축을 네모난 형태로 둘러 쌓아 놓았고, 선돌 앞에서 제사의식을 지낸 것으로 짐작되며, 선돌 주위에는 고인돌이 여러 기 남아있다.
진천동 입석 : 진천동에서 선돌을 세운 주위로 석축을 네모난 형태로 둘러 쌓아 놓았고, 선돌 앞에서 제사의식을 지낸 것으로 짐작되며, 선돌 주위에는 고인돌이 여러 기 남아있다.
진천동과 월암동 일대에 남아 있는 선돌은 한때 ‘영암(靈岩)’이라 불렸다.
영험이 깃든 바위,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존재였다.
향토사학자 이국성 씨는 “이 지역의 돌 하나하나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고 말한다.
정월이 되면 사람들은 음식을 장만해 돌 앞에 놓고 절을 올렸다. 밤새 불을 밝혀 꺼지지 않도록 지키기도 했다. 아이를 얻지 못한 여인이 새벽녘 홀로 찾아와 빌고, 돌가루를 갈아 먹으면 아이를 얻는다는 믿음도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기도 끝에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구전으로 남아 있다.
아이를 얻은 뒤에는 다시 그 아이를 돌에 ‘판다’. 이는 ‘팔아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돌의 수명과 기운을 아이에게 빌려주는 상징적 행위였다.
해마다 남들 몰래 찾아와 인생사를 하소연하고,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굿을 하며 마음을 풀어냈다. 이런 행위를 단순한 신앙이나 미신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돌은 신이기 이전에,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을 때 찾아와 하소연하고, 삶에 필요한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빌던 공간이었다.
이국성 씨는 “그 시절에는 종교라는 개념보다, 오래 변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더 컸다”며 “사람보다 오래 사는 나무, 변하지 않는 돌에 인간은 자연스럽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 “오늘의 시선으로 이를 도외시하거나 과도하게 신성시할 필요는 없다”며 “표현 방식만 달랐을 뿐, 인간이 두려움을 마주하고 삶을 이어가려는 본질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중방지(유갓들 못) : 대규모 두꺼비 서식지로 약 4,500㎡ 크기의 저수지에 살고있는 두꺼비 올챙이는 150만여 마리가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곡동에 자리한 중방지는 이름부터 이야기를 품고 있다. ‘중(中)’은 들의 한가운데 있다는 뜻이고, ‘방지(方池)’는 네모난 연못을 의미한다. 원래 이곳은 ‘유갓들 못’으로 불렸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들판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이곳은 한실마을·새각단마을·갈밭마을을 아우르던 넓은 들판의 중심이었다. ‘유갓들’이라는 이름에는 여러 해석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유정승이라 불리는 인물이 벼슬의 대가로 받은 토지라는 설, 혹은 이 일대에 학문을 닦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는 의미에서 ‘유가(儒家)의 들’이라는 해석이다.
이 지역에는 ‘삼필봉’이라는 세 개의 봉우리가 있다. 붓 필(筆) 자를 쓰는 삼필은, 이곳이 글을 읽고 과거에 응시하던 선비들의 마을이었음을 상징한다. 과거에 급제한 이들이 말에 올라 풍악을 울리며 돌아오던 길목은 지금의 유천교 인근 고개였다.
이 고개는 과거에 급제한 선비가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목으로 북을 치고 풍악을 울리며 넘었다 하여 ‘고성고개’, 혹은 북소리를 흉내 낸 ‘퉁퉁고개’로 불렸다. 지금은 평지처럼 보이지만, 예전에는 합격의 기쁨과 마을의 축제가 뒤섞이던 상징적인 통과의례의 장소였다.
청룡산과 대덕산 사이에서 내려온 물길은 낙동강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진천천’이라 불리는 이 물줄기는, 옛날에는 ‘흐른내’라 불렸다.
이 이름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단순히 ‘물이 흐르는 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피가 흘러 이름이 붙었다는 비극적인 사연이다. 고개를 넘어가던 사람들이 통행을 막은 부자에게 쫓기다 크게 다쳐, 피가 내를 붉게 물들였다는 전설이다.
이런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며 전설이 되었고, 피가 ‘흐른 내’는 한자로 ‘유천(流川)’이라는 지명으로 남았다.
이국성 씨는 “강은 늘 삶과 죽음, 이동과 정착의 경계였다”며 “이 물길을 따라 선사인들이 내려왔고, 사람들이 모여 살며 이야기를 남겼다”고 설명한다.
옛 조암(영암) : 조암은 월암동의 바위이면서 이 일대의 자연촌락이다. 볏섬과 같은 모양의 바위라 하여 ‘조암(租巖)’으로 불렀으며, 또한 바위에서 낚시를 했다 하여‘조암(釣巖)’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전에 큰 바위가 여럿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진 월암동.
이 월암동에 남아 있는 선돌은 그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쌀 조(租)를 써서 ‘조암’, 낚시 조(釣)를 써서 ‘조암’, 할아버지 조(祖)를 써서 ‘조암’이다.
봄철 보릿고개를 넘기던 시절, 허기진 눈에 선돌은 나락가마니처럼 보였고, 여름철 홍수가 나면 물 위로 드러난 돌 위에서 낚시를 하기도 했다. 또 마을 전체를 배에 비유해, 당산나무를 돛대로, 선돌을 닻으로 삼아 마을이 떠내려가지 않기를 바랐다는 이야기는 이 지역 사람들의 상상력과 공동체 의식을 보여준다.
지금의 선돌공원에 위치한 선돌(조암)
현재의 선돌공원에 가면 고인돌을 볼 수 있다.
현재 월암동 선돌공원에는 청동기 시대 입석으로 추정되는 선돌 세 기가 남아 있다. 한때는 다섯 기 이상이 줄지어 서 있었지만, 개발 과정에서 일부는 사라졌다. 돌은 마을을 붙잡아 두는 경계선이자, 세대를 이어온 기억의 표식이었다.
한샘청동공원의 당산나무 : 제강점기 초까지는 동제를 지내고 난 후 대천동과 월성/월암동이 편을 나누어 줄당기기와 달집태우기 등 전례놀이를 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에 의해 사라졌다가 해방 후 다시 진행되었다고 한다.
월성동 한샘청동공원은 ‘큰 샘’이라는 뜻의 순우리말 지명을 간직한 곳이다. 마르지 않는 샘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곳은 600년 넘게 사람들이 살아온 터전이다.
500년 가까이 자란 회화나무는 마을의 동제나무였다. 1970년대 초까지 이곳에서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가 이어졌다. 지금도 달서구 곳곳에서는 동제가 명맥을 잇고 있다.
이 일대는 3천 년 전에는 무덤이 있었고, 그 위에 집이 들어서고 농사가 이어졌다. 삶과 죽음, 쉼과 노동이 겹겹이 쌓인 공간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 활동의 터전이기도 했다.
낙동강을 따라 내려온 선사인들은 물과 땅, 산이 모두 가까운 이곳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낮은 구릉에 자리 잡았다가, 홍수를 피해 점차 지금의 월성·상인 일대로 이동했다. 살아가는 공간과 죽음을 기리는 공간은 분리되었고, 진천동 일대는 제사와 공동의식을 치르는 신성한 장소로 자리 잡았다.
이국성 씨는 “선돌과 당산나무, 샘과 연못은 사람들이 마음을 기댈 수 있었던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며 “지금의 기준으로 미신이라 치부할 필요도, 과도하게 신성시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삶을 이어가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수천 년 동안 이 자리에서 돌은 농부를 보고, 아이들을 보고, 마을을 지켜봤다. 지금은 공원이 되고 산책로가 되었지만, 그 아래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이야기와 두려움, 기도가 켜켜이 쌓여 있다.
돌은 말이 없지만,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관련 영상은 푸른방송 유튜브 채널 「달서야사」에서 볼 수 있다.
https://youtu.be/SfJ_00ckQUU?si=krMHFP-DinqdL7t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