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발해마을’ 가보셨나요~
  • 푸른신문
  • 등록 2020-12-17 15:46:16
기사수정

경산시의 남천을 따라 돌아들면 크지 않은 마을 입구에 발해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마을로 들어서면 대조영의 흉상과 사당이 있고 마을곳곳에 발해의 흔적을 그려 놓았다. 코로나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마을은 고즈넉해 보였다. 태극기가 찬바람에 힘차게 펄럭이고 사당뒤편 대숲은 겨울바람도 아랑곳 하지 않고 푸르름을 간직한 채 꼿꼿이 버티고 서 있었다.
경산에 발해마을 이라니, 조금 생소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발해마을은 대조영의 후손인 협계태씨들의 집성촌으로 30여호가 살고 있고 봉황이 그려진 문패에 발해 43세손으로 표기한 집들이 많았다.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후손이 태씨로 불려지게 된 것은 발해가 서기926년쯤 멸망 후 서기934년 대광현 황태자가 수만 민중을 거느리고 고려로 내려오니 고려 태조 왕건이 이들에게 골고루 벼슬을 내리고 황해도 배주(지금의 배천) 에서 편히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후 서기1228년 태집성 대장군이 서북병마사로 몽고군을 물리친 공으로 협계현에 봉하여지면서 협계태 씨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서기1592년 태순금 통정대부가 경산으로 내려와 지금의 남천면 송백리에서 수백 년 대를 이어 위폐를 모시다가 1920년에 이르러 사당을 중건 하였다.
또 다른 문헌에서는 고려시대 그 이전부터 대와 태는 통용되어 기록되어 있고 중국의 역사서 동사통감에도 대조영이 태조영으로 기록된 것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대씨로 쓰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유민들을 규합하여 220년이나 우리민족의 맥을 이어 만주를 호령하던 발해의 역사를 일깨워줄 발해마을 주민들의 자긍심은 대단했다. 2005년 진해에서 거행된 대조영함 진수식에도 초청되어 참석하였고, 1억원을 들여 5년 동안 9번의 국가심의과정을 거친 대조영의 영정은 2012년에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2013년부터는 영정을 모시고 발해마을 고 왕전에서 매년 춘분날에 춘분대제를 올리고 있다. 2017년에 대조영의 흉상도 제작되어 추모제 정원에 모셔져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마을입구에 성을 축조하고 이곳에 오면 발해의 역사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도록 역사전시관과 박물관도 만들어 해동성국 발해역사를 길이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2013년 중국 지린성의 발해 왕궁터 에서 가지고 온 흙을 대조영 황제의 왕릉을 재현한 다음 그 안에 넣어 두고 싶다고 한다. 조상의 뿌리를 찾아 지키려는 발해마을 주민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선비의 가풍을 지키면서 영원히 번창하기를 기원한다.

이윤영 객원기자

2917년에 만들어진 대조영 흉상

달서 문화학교 수강생 모집
0
푸른방송_241205
계명문화대_241224
대구광역시 달서군 의회
으뜸새마을금고
대구FC_241205
이월드_241205
영남연합포커스_241205
한국인터넷뉴스영남협회
구병원_241205
인기글더보기
최신글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