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04. 대구 최고(最古) 신도비, 이철견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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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3]

1) 프롤로그


유적답사를 하다보면 다양한 종류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묘소 앞에 세워진 묘비, 유적이 있었던 자리임을 알려주는 유허비,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 내력을 적은 사적비, 인물을 칭송하는 송덕비, 부도탑 앞에 세우는 부도비 등등. 이중에는 신도비도 있다. 아무나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수가 적은 신도비. 우리 고장에도 몇 개의 신도비가 남아 있다. 그 중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신도비가 우리 고장에 있다. 옥포읍 교항리 아파트단지 뒤편 공원에 있는 ‘이철견 신도비(각)’가 그것이다.    

2) 신(神)의 길을 표시하다, 신도비
신도비(神道碑)는 ‘신이 다니는 길목에 세운 비석’ 혹은 ‘묘소에 있는 신령을 높이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묘소에 세우는 묘비는 기원 전후인 중국 진한(秦漢)시대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묘비와는 별개로 묘소 인근에 신도비가 등장한 것은 중국 진송[晉宋·5세기 초]시대다. 신도비는 묘 앞에 신을 위한 길을 낸 다음 ‘돌기둥’을 세워 신도를 표시했던 것이 나중에 비석의 형태로 변한 것인데, 당시에는 천자와 제후만이 세울 수 있었다. 신도비는 묘소 인근에 세우되 묘소 동남쪽에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이는 묘소 동남쪽을 신이 다니는 길목, 이른바 ‘신도(神道)’라고 한 것에 연유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에 신도비가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왕을 비롯한 2품 이상의 고관만이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후기로 오면서 2품관이 아니더라도 공훈이나 학덕이 뛰어난 인물, 불가의 고승들도 신도비를 세웠다. 신도비문의 구성은 ‘표제[전액]·서·명·추기’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표제’는 비 몸돌 최상단에 가로로 글자가 새겨진 부분이다. 대부분 전서체로 새긴 까닭에 ‘전액’이라고도 한다. ‘서’는 비문의 본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물의 성명·세계·생졸·성장·이력·언행·공적·자손 등이 산문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명(銘)’은 서 다음에 나타나는 운문으로 일종의 추모시다. ‘추기’는 필요에 의해 추가하는 내용으로 편지글에서 사용하는 추신과 의미가 같다.


3) 세조의 처조카 양평공 이철견


‘이철견신도비’에 기록된 이철견의 이력을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참고로 이 신도비문은 이철견과 동시대 인물인 허백당 홍귀달이 지은 것이다. 그는 연산군 시절 조정의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렸다가 무오사화 때 좌천되었고, 같은 해에 손녀를 궁중에 들이라는 연산군의 명을 거역해 장형을 받고 유배 중 교살당한 인물이다.

공의 이름은 철견(鐵堅)이요, 자는 연부다. 아버지 이연손은 공조참판을 지냈고, 어머니 정부인 윤씨는 우의정에 증직된 윤번의 따님이자 세조 비인 정희왕후의 언니다. 공은 재주와 기량이 남달라 세조로부터 특별한 예우를 받았고, 예종·성종·연산군 대까지 벼슬이 이어졌다. 헌릉참봉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충청도사·한성부판관을 지냈으며, 두 번 무과에 급제했다. 훈련원 도정·평안서도 절도사·지중추부사 겸 지의금부사를 지냈으며, 성종 초에 공신에 올랐다. 공은 일찍부터 군율을 익혔다. 한번은 연산군이 공을 대장으로 삼아 군대를 사열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군대를 사열할 때는 반드시 공을 대장으로 삼았다. 공이 삼도의 관찰사를 지낼 때는 관리에 대한 평가가 엄명했으며, 판서를 지낼 때는 모든 사무가 바로 잡혔다. 금군을 총괄하고 사헌부의 대사헌이 되자 군대의 위엄이 확립되고 조정의 기강이 엄숙해졌으며, 두 차례 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승문원 제조가 되자 교활한 관리가 숨을 죽이고 모든 벼슬아치들이 의젓해졌다. 세조와 성종 때 훌륭한 문관과 무관이 많았으나 대부분 한쪽에만 능했고 공처럼 재주와 능력을 겸비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은택과 높은 작위를 받았으니 이는 행운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다. 공은 성품이 온화하고 후덕하여 동네의 종족과 친구들이 좋은 일이나 궂은 일, 경사나 상사를 당하면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공은 모습이 총명하고 늠름하여 말씨와 행동거지를 대하는 사람마다 모두 장수나 재상이 될 기량임을 알았다.


4) 대구 최고(最古) 신도비


이철견 신도비는 지금으로부터 523년 전인 1497년(연산군 3)에 세워진 것으로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신도비다. 그런데 이 신도비는 처음부터 지금의 옥포읍 교항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본래는 묘와 함께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있었는데, 1969년 도시계획으로 경주이씨 양평공파 선영이 있었던 이곳으로 묘와 신도비를 옮겨온 것이다. 하지만 2006년 3월 이 지역이 또 다시 택지개발이 되자 신도비만 지금의 자리에 남겨 두고 나머지 묘는 논공읍 남리로 옮겼다. 이철견신도비는 ‘양평공신도비각’이란 편액이 걸린 정면 1칸·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갖춘 신도비각 안에 있다. 장방형 화강암 비 받침돌 위에 하나의 대리석으로 된 비 몸돌과 비 머릿돌을 갖췄다. 규모는 높이 145cm, 너비 83cm, 두께 21cm로 조선 전기 우리나라 신도비의 정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5) 에필로그


종종 비문에 대한 신뢰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칭송하는 내용만 들어 있으니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너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지적에 대한 답변으로 좋은 글이 하나 있어 그대로 인용해본다.

비각으로 새겨지는 문장은 대개 당대의 문장가가 조심스럽게 작성한 것으로 개중에는 전아한 문체와 화려하거나 질박한 수사로 문학적인 가치를 가진 것이 많으며, 글씨 또한 당대의 명가들이 쓴 것으로서 예술적 향기가 높은 것이 많다. 비문 자체는 사자의 공덕을 칭송하거나 기념될 만한 사적을 찬양하는 것이므로 대개 당사자나 당해 사적의 미점(美點)을 나열한다. 이로 인하여 과분한 찬사나 수식이 덧붙여지기도 하지만, 전혀 무근한 사실을 조작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사실에 근거하여 비문을 짓고, 사실을 직접 목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기록이나 전문되는 사실 중에서 근거 있는 자료를 채택하여, 비문 찬술자가 그 이름을 밝혀 서술의 책임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한국고전의례상식, 정경주, 2000)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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