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91. 박팽년과 아들, 손자 3대의 충을 기린 삼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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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6]

1) 프롤로그


며칠 전 달성군 하빈면 묘골 소재 사육신기념관 관련한 사업 자문에 응한 적이 있었다. 내용인즉슨 역사체험콘텐츠 활용사업의 일환으로 기념관 내부에 버츄얼 체험존을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쉬운 말로 요즘 유행하는 가상현실·증강현실체험프로그램을 통해 묘골 육신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고품격 체험형 관광자원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최첨단 과학기술을 선보일 이곳 사육신기념관 곁에 조선시대 정려각 한 동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기념관 건물에 가려 방문객 중 열에 아홉은 그냥 모르고 지나치는 유적이다.


2) 박팽년·박순·박일산[박비]


혹시 아래의 단가 한 수가 기억나시는지?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며,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 마다 좇을 손가?


학창시절 고문시간에 배웠던 취금헌 박팽년 선생의 시조다. 김질의 밀고로 사육신에 의한 단종복위운동은 좌절되고 관련자들은 잔혹한 국문을 받았다. 그때 세조는 옥중에서 죽어가는 박팽년에게 ‘하여가(何如歌)’ 한 수를 던졌다. [참고로 『육신전』의 출처가 되는 『추강집』에는 세조의 명을 받은 김질이 옥으로 찾아가 박팽년에게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시작되는 ‘하여가’는 고려 말 이방원이 정몽주를 시험하기 위해 읊었다는 바로 그 시조다. 당시 거사에 연루된 자들은 혹독한 고문과 함께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 수가 무려 2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육신 중에서 류성원은 자신의 집에서 자결했고, 박팽년은 국문을 받던 중 옥사했다. 나머지 성산문·이개·하위지·유응부는 형장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세조는 사육신의 시신을 찢어서 머리는 한양 저자거리에 효수했고, 팔다리와 몸통은 전국으로 내려 보냈다고 한다. 세조! 참으로 모진 양반이다. 그런데 모질기는 사육신도 매 한가지다.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 이들의 최후를 보면 과연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저렇게까지 독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니 말이다. 여하튼 박팽년 일가는 사육신 사건으로 풍비박산이 됐다. 박팽년 자신은 물론 아버지 박중림, 동생 박인년·박기년·박대년·박영년 그리고 아들 박헌·박순·박분, 3대 9명의 남자가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모·처·첩·딸·며느리 같은 여자들은 공신이나 관아의 노비로 보내졌다. 하지만 충신 가문에 하늘의 보우가 있었다. 당시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이씨는 임신 중이었는데, 친정집이 있는 대구 관아의 노비가 되어 아들을 출산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친정집 여종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바꿔 기르게 된다. 이렇게 성장한 인물이 바로 박일산[박비]이다. 박일산은 이후 자신을 길러준 외가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는다. 그리고 자신이 나고 자란 그 외가동네에 99칸 종택을 짓고 살았다. 그 동네가 바로 ‘묘골박씨·육신사’로 유명한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이다. 이처럼 박팽년·박순·박일산 3대로부터 시작된 묘골의 역사는 어림잡아도 560년이 넘는다.


3) 3대 충신을 기린 정려각, 삼충각


순천박씨 충정공파 묘골 세거지 초입에 넓은 주차장을 갖춘 사육신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을 좌측으로 돌아 뒤편으로 가면 충신 정려각인 ‘삼충각(三忠閣)’이 있다. 삼충각은 본래 묘골 종택 앞에 있었던 정려와 그 뒤에 세운 정충비가 합쳐진 형태다. 삼충각 정려는 모두 두 번에 걸쳐 내려졌다. 처음은 1755년(영조 31) 박팽년에게 내린 것이고, 두 번째는 1831년(순조 31) 박순과 박일산에게 내린 것으로 두 번 모두 충신에 대한 정려다. 그런데 삼충각은 건립 주체가 다른 정려각과는 좀 다르다. 보통의 경우 정려각은 해당 문중이나 해당 고을에서 비용을 부담하여 세웠다. 하지만 삼충각은 당시 전·후 2명의 경상도관찰사 주도로 경상도 71고을 수령들이 비용을 찬조하여 건립했기 때문이다.


4) 순천박씨삼세 정충기실비(順天朴氏三世 旌忠記實碑)


삼충각은 기와를 올린 흙돌담장 안에 홍살벽을 갖춘 비각형태를 하고 있다. 내부에는 정려편액을 비롯한 2개의 정려기·영건시임사록기·시판·순천박씨삼세 정충기실비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정충기실비와 관련하여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한문에는 띄어쓰기가 없다는데 왜 ‘세’ 자와 ‘정’ 자 사이를 한 칸 띄웠냐는 것이다. 이는 한문에만 있는 대두법(擡頭法)이라는 용법 때문이다. 대두법은 존경을 표해야하는 대상에 해당하는 글자 앞을 한 두 칸 띄우거나 아니면 줄을 바꾸어 쓰되 다른 줄보다 한 두 줄 올려 쓰는 용법을 말한다. 순천박씨삼세 정충기실비는 순천박씨 3대 충신 정려에 대한 사실을 기록한 비다. 여기서 ‘정(旌)’은 임금이 내린 정려를 의미하는 것으로 임금의 행위에 해당하는 글자이기 때문에 공경의 의미로 앞에 한 칸을 띄운 것이다.   


5) 에필로그


순천박씨삼세 정충기실비 비문은 1834년(순조 34), 박팽년의 방계 후손인 홍문관교리 박승현이 지은 글이다. 그런데 비문을 읽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 있다. 박팽년·박순·박일산 3대에 걸친 충신 정려에 대해서는 매우 영예롭게 여기면서도, 박팽년의 아버지인 박중림에 대한 정려가 내려지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의아해 하는 대목이다. 박중림은 사육신 사건 당시 이조판서의 신분으로 단종복위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사육신들과 마찬가지로 혹독한 고문과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켰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위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던 증손자 박일산도 충신 정려를 받았는데, 정작 박중림은 어찌하여 정려를 받지 못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타.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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